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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회 백제기행 - 다시 갑오년, 동학기행 넷
이름 관리자 등록일 2014-10-28 12:01:31 조회수 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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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기행-다시 갑오년, 동학기행'은 2014년 갑오년 2주갑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기획됐습니다. 지난 4월과 6월, 8월에는 3회에 걸쳐 전북을 중심으로 동학사적지를 답사했습니다.


‘백제기행_다시 갑오년, 동학기행’의 네 번째 일정은 <그날의 함성, 남도의 들녘을 가다>라는 주제로 전남 장성과 장흥 일대의 동학사적지를 살펴봤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북 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번 기행에서는 농민군이 최초로 정규군인 경군을 물리쳤던 전남 장성의 황룡 전적지와 동학농민군의 최후격전지로 꼽히는 장흥 석대들 전적지, 옥산리 전투터 등을 답사했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의 진로 밖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새긴 역사의 흔적들을 만나봤습니다.



그 첫번째 장소는 전남 장성의 황룡 전적지입니다. 이곳은 잘못된 정치와 행정을 일삼던 벼슬아치를 나무라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의 투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가 된 황룡전투 전적지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전주 점령 계획을 세우고 가장 좋은 장소로 황룡을 선택했습니다. 총알을 막을 수 있도록 대나무를 원통모양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이용하여 동학농민군은 이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를 점령하였습니다.



화살 모양의 웅장한 기념탑 뒤 편에는 곽재구의 시 ‘조선의 눈동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시집 <참 맑은 물살>에 실린 동학 농민군 황룡전투 백주년에 바치는 시라고 합니다.


이 시를 참가자 중 유창옥 선생님께서 비장미가 넘치는 목소리로 읊어주셨는데요. 가을 안개가 껴서  소슬한 분위기를 한층 업되게 해주셨습니다.



1994∼97년 장성군에서 이곳에 승전기념공원을 비롯해 여러 시설물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는데요. 안개가 껴서 조금 아쉬웠지만 조형물과 주위 경관이 어우러지고 있으며, 근처에 경군대장이었던 이학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의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백제기행의 강사는 장성과 장흥의 현지 전문가들이 맡아주셨는데요. 장성은 김효선 문화해설사가 동학혁명은 물론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설도 곁들여주셨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역사 이야기를 참가자들을 사로잡을만한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함께 들려주셨습니다.



장성 황룡 전적지에 푹 빠져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라 시내에 있는 시장에 점심을 먹으러 왔습니다. 점심을 먹기 전 잠시 자유시간을 가져서 시장을 둘러봤습니다. 몇 몇 참가자는 시장에서 버섯이나 감 등을 사는 분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오늘 식사는 매생이 떡국과 육회 비빔밥, 산채 비빔밥 중에서 선택을 했는데요. 풍성한 밑반찬과 맛깔러운 양념이 인상적인 가게였어요.



이어 장흥의 동학농민혁명유적을 찾아 갔습니다. 주요 지도자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활동지와 장흥전투가 벌어진 전투지로 구분됩니다.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의 주요한 활동지로는 이방언 장군의 남면(현 용산면) 일대, 김학삼 접주의 고읍(현 관산면), 이인환 장군의 대흥면(현 대덕읍)과 회진의 덕도 일대, 이사경 장군의 용계면(현 부산면) 용반리 일대 그리고 구교철 접주의 웅치(당시 장흥군)일대 등입니다. 동학혁명기념탑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마을이 환하게 보이는 곳에 올라와 강사님의 강의를 마저 들었습니다.



주요 전적지는 2차 기포 시 관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장흥읍의 벽사역(현 원도리 일대)과 장녕성(현 읍사무소에서 법원 경찰서 일대), 강진현 그리고 병영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병영성 함락 후 일본군과의 첫 교전이 이루어진 유치 조양촌전투지와 부산면 빈재 일대의 유앵동 전투지, 장흥읍의 석대전투지, 관산읍의 옥산전투지 그리고 대덕읍의 월정전투지가 있습니다.


남면(현 용산면)은 장흥의 동학지도자 이방언 장군의 근거지입니다. 장흥부가 있던 장흥읍과 불과 이십 여리 떨어져 있고 자울재 산길과 안양 방면의 해안길로 장흥읍과 연결됩니다. 옛 자울재 길은 지금은 포장길 외편으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용산 이남 농민군들의 진격로이자 석대전투 후 후퇴했던 퇴각로입니다. 이방언 장군이 살던 묵촌마을은 용산면 소재지 남쪽 부용산 아래 위치한 유서 깊은 고촌입니다.


 
 다른 동학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군과의 석대전투 후 가산이 몰수, 파손되고 가족들은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고 생가의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단지 마을 입구에 2-3백년 된 동백나무숲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반가웠습니다. 장군의 묘소는 마을 뒷산에 모셔져 있고 마을 앞 들판은 도르뫼 들판이라고 하는데 이방언 장군이 휘하의 동학농민군들을 집결하고 훈련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이어 장흥의 관산대장 이방언의 묘를 찾아갔습니다. 이방언 장군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양심적 선비로서 동학 입도전인 1888년에는 전라감사와 담판하여 무리한 조세를 시정하는 등 지역에서 높은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장흥동학만이 아니라 삼남 포교장으로서 남북접의 갈등을 조정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주요한 지도자로 활약하였습니다.




또한 1894년 전봉준 장군의 무장기포 당시 이인환, 강봉수 접주 등과 함께 장흥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 진영에 합류하였으며, 장성 황룡전투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두어 남도장군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이후 장녕성과 병영성을 점령하는 등 장흥전투를 지휘하였고, 석대 전투 후 체포되어 장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이번 기행에서 또 한 번 안타까웠던 것은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아직까지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보거나, 참여자들과 그 자손들이 알맞은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와 국민들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어 석대전투 패전으로 퇴각한 5~600여 농민군들이 은거하였고 이들을 모두 인근 섬으로 피신시킨 소년뱃사공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다를 찾아갔습니다. 특별히 이 날은 그분의 손자께서 직접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덕도에는 석대전투 후 5-600여 명의 동학군이 은신했던 용암산록(한재공원 일대)이 있고, 소년사공 윤성도가 이들을 인근 섬으로 도피시켰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윤성도는 갑오년 당시 16세로 회령진성 무혈입성부터 장흥, 강진전투에 참여하였고, 12월 15일 석대전투 패전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덕도에 많은 농민군들이 대거 피신하였고, 낌새를 알아챈 관군과 일본군의 색출활동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어려서부터 도선에 능했던 소년사공 윤성도가 풍선(風船)을 이용해 용암산록과 덕도 각지에 피신해 있던 농민군 5~6백여명을 주로 밤에 수도 없이 인근의 금당도, 약산도, 평일도 등 각지의 섬으로 분산 피신시켰습니다.




당시 섬이었던 덕도는 전 주민이 단결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으며 피신한 동학군을 보살펴 한사람도 희생자가 없이 인근 섬으로 도피시킨 곳입니다. 덕도 주민들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끝나지 않고 일제하 천도교 항일독립투쟁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제는 유유히 흐르는 바다처럼 소년 뱃사공 얘기와 120년 전 그 날의 함성들은 아련하게 느껴집니다. 이번 기행은  장성과 장흥의 현지 전문가들과 투쟁자들의 직계 자손께서 직접 진행을 맡음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투쟁자들의 혁명 이후의 삶에 대해 생생히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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