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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울의 궁, 왕의 공간에서 역사를 만나다
여행장소 191회 백제기행 다시, 역사를 만나다① | 조선왕조부터 대한제국까지
작성자 이정우
기행일 2018-01-20



하루 기억에 남는 이야기, 기억해야할 이야기를 적는 일기.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기분이 좋은 일 일수도 있고 기분이 나쁜 일 일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사건이었고, 기억에 남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그 일기장을 펼쳐보면 지나간 시간들과 다시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의 나, 미래의 나를 저울질도 할 수 있다.
역사는 꾸준히 써내려온 일기와 같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흔적과 기록을 통해 지나간 세월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 만남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게 하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안목도 갖게 한다. 역사의 시간이, 역사의 공간이 옛 조선왕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쌓이는 공간이 있다. 바로 왕들의 공간인 궁궐이다.

2018년 첫 백제기행은 조선의 궁궐에서 역사를 마주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나섰다. 우석대 조법종 교수와 함께하기에 더욱 기대됐던 기행. 고즈넉한 한국의 멋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의 궁궐에서 하루하루 역사를 만들었던 그 시간과 이야기를 만난다.





조선 건축의 아름다움, 경복궁
오랜만의 서울의 광화문 광장. 아직 아른거리는 촛불과 그날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의미 있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아직 꺼지지 않은 광화문 광장은 여전히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 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장려한 대문이 보인다. 바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 대로다. 광화문은 높은 석축 위에 중층의 문루가 높이 앉아  그 모습이 장군과 같다. 조선의 5대 궁궐의 대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가만 보면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장려한 외관을 지녔지만 균형과 조화미가 대단히 아름다웠다. 과거 광화문은 조선의 5대궁 중 유일하게 전면 담장의 두 끝 모퉁이엔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세웠었다. 더욱 옹골져 보였을 과거의 모습이 현재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 되었고, 동십자각은 도로 확장으로 담장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쉬움을 더했다.
두 개의 망루 대신 경복궁을 지키고 있는 건 해치상이다. 호랑이처럼 생긴 것이 가만 보면 뿔이 나 있고 털이 아닌 비늘이 덮인 모습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엔 단호함이 묻어 나온다. 법과 정의의 상징이자 서울의 상징인 이 동물은 상상속의 동물이다. 원래 해치상은 광화문에서 80m 떨어진 육조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뿔로 받아버린다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 궁궐 출입을 할 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올바른 정치를 펼치라는 당부와 경고의 의미를 동시에 담아 해치상을 두지 않았을까. 실제로 신하들이 광화문을 드나들 때 마다 이 해치 꼬리를 쓰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나도 괜히 해치 꼬리를 쓰다듬어 본다.
곧이어 근정전이 나온다. 경북궁의 으뜸 전각인 편전으로, 그 이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각에 놓인 섬돌인 월대는 다른 궁궐과 다르게 난간을 두르고 있다. 그리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과 올망졸망하게 십이지신 등을 조각해 놓았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근정전의 처마가 나를 확 사로잡았다. 내가 본 처마 중 가장 아름다웠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그 빛깔의 처마는 한복의 곡선과도 닮은, 기와의 부드러운 선과 어우러져 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근정전의 처마는 단청의 화려함이 으뜸이었다. 물론 소박하고 수수한 처마도 있지만 경복궁은 임금이 사는 곳인 만큼 더 없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단청을 꾸몄다.
경복궁 안에는 아름다운 누각이 하나 있다. 일정한 너비의 시원하게 뻗은 돌기둥 위에 무심한 듯 툭, 올려진 그 모습이 특히 정갈해 보이는 이 누각은 경복궁 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경회루다. 경회루는 건축물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그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면 탁 트인 풍광도 감탄사를 자아낸다고 한다. 심지어 이 풍광엔 전설도 있다. 경회루의 2층 누각에 오르면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중종은 반정에 성공한 후 연산군과 관계된 처가 때문에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시켜야 했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함께 한 정분을 잊을 수 없어 가끔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에 있는 신씨의 집을 바라보곤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신씨는 경회루에서 중종이 바라볼 때 눈에 잘 띄도록 궁궐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았다. 중종이 바위에 놓인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 싶은 마음을 삭였다는 치마바위 전설이 경회루와 관련하여 전해 온다. 못에 비친 그림자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회루.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그 아름다운 모습은 경복궁의 미(美)를 대표한다 할만하다. 경회루는 동절기에 출입을 막아 아쉽게도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경복궁엔 호사스러운 아름다움도 있다. 바로 자경전의 꽃담길이다. 자경전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인 신정왕후에게 선물한 대비전이다. 그만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서쪽 담에는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양들과 갖가지 꽃나무들을 새겨 넣었다. 가장 호사스러우면서도 최고의 감상용 꽃담을 선물한 것이다. 또한 뒤편 담장에는 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굴뚝이 설치되어 있다.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들을 묘사하고, 위 아래로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도저히 굴뚝으로 보이지 않는, 좀 더 굵은 담으로 보이지만 굴뚝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시대 궁궐 굴뚝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을 침전(寢殿)이라고 한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여기에 숨은 지상낙원이 있다.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아미산은 도가와 불가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다. 계단식 화단과 굴뚝의 세심한 조형미가 먼저 보인다. 꽃담과는 다른 섬세함이 보인다. 하지만 이 아미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평소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왕비를 위해 작은 지상낙원을 만들었다는 마음에 있을 것이다. 아침 안개와 굴뚝의 연기가 차분히 가라앉으면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의 신선들이 영물과 노니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왕의 공간과 상징에 서린 사연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서울의 궁에는 그만큼 숨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도 하나의 큰 재미였다. 먼저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곳에는 다른 공간과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용마루가 없다. 바로 왕은 곧 용인 이유에 있다. 그래서 왕의 얼굴을 용안, 앉는 자리를 용상이라고 하고 입는 옷을 용포라고 한다. 따라서 용과 같은 왕 위에 또 하나의 용이 있을 수 없으며, 용마루가 있으면 왕이 잘 때 왕의 기운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 이런 양식을 '무량갓'이라 한다. 왕과 관련된 위한 장치가 더 있다. 근정전의 마당, 즉 조정에 깔려 있는 화강암이 용안을 위해 세심한 장치를 했다. 용안이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과 찡그러지는 얼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은 것이다.
이 근정전 처마 밑엔 그물이 걸려 있는데 '부시'라고 한다. 그물 같은 것이 최근에 설치한 것 같지만 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날부터 사용했다. 새의 배설물은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지만 강한 산성이라 목조건물인 궁궐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물을 치기 힘든 곳엔 오지창을 꽂아 새들이 앉는 것을 막았다. 근정전의 주위에도 있지만 대표적인 궁궐의 주요전각에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 눈에 밟힌다. 이것은 '드므'라 하는데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하늘의 화마(火魔)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도망감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것이다.
이런 숨은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숨기려 한 이야기도 있다.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다.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청궁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시해하는 것도 모자라 건청궁 넘어 보이는 나무 밑에서 시녀들과 함께 불에 태워 화장한다. 숨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을미사변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미국공사관으로 옮겨 가려다 실패하고, 드디어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변복을 한 채 세자만 데리고 궁을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왕이 궁에 들어가지 못한 다면 그것이 어찌 궁일까.


덕수궁과 우리나라 근대의 시작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품은 경복궁과는 다른 모습의 덕수궁은 현재 우리의 풍경과 가장 닮아 있다. 덕수궁은 문화적 근대화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며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밝히고 강한 주권 의지를 표명한 이 시기에 들어온 물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바로 커피, 맥주, 양산, 벨트, 서양 악기들이 들어왔다. 그중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백열등을 밝혔다.
커피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고종은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맛보았는데 이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계속 즐겼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 정관헌은 이름처럼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는' 휴식용 건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석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식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기둥 상부에 청룡과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서양식 건축과 한국 전통 건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덕수궁엔 하얗게, 로마건물처럼 보이는 서양식 건물도 눈에 뛴다. 석조전으로 고종 당시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전통 궁궐에 서양식 건물이라니. 이는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근대국가의 상징이자 근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덕수궁. 비록 우리의 근대사는 여기저기 외세에 의해 그 흔적이 얼룩져 있기에 아름다워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상처받은 이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고 이것이 진실이라고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말해주고 있다. 이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다시 이런 역사가 반복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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