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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울 한복판에서 참한 도시를 꿈꾸는 사람들
여행장소 151회 백제기행 - 옛집과 옛동네를 되살린 지혜, 북촌한옥마을과 서원마을
작성자 황재근
기행일 2014-02-15


서울 한복판에서 참한 도시를 꿈꾸는 사람들


151회 백제기행 - 옛집과 옛동네를 되살린 지혜, 북촌한옥마을과 서원마을



늦겨울과 초봄의 사이, 미세먼지 없이 청명한 하늘이 펼쳐졌던 지난 2월 15일 백제기행은 서울 북촌 한옥마을로 향했다. 이번 ‘다시 문화유산답사’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기행이었다. 그간의 ‘문화유산답사’가 유적지와 유물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찾고자했다면 이번 일정은 역사적 터전 위에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기행이었다. 


이번 기행의 강사는 정석 가천대 교수님께서 맡아주셨다. 도시연구자인 정교수님은 2001년 북촌가꾸기 계획부터 참여해 오늘날 북촌 한옥마을의 밑그림을 그린 분이다. 정교수님을 통해 북촌의 역사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주거단지, 북촌


북촌이라는 이름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에 자리 잡은 명실상부한 한양의 중심부다. 북촌이 포괄하는 범위는 가회동과 송현동, 안국동, 삼청동, 계동 등 여러 개의 법정동에 걸쳐있을 정도로 드넓다. 높은 지대에 올라 바라본 북촌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있었구나’였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넓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도 그간 스쳐지나가지도 못했구나’였다. 서울에 종종 다녀봤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대학가나 번화가 일대였다. 돌이켜보니 4대문 안의 진짜 서울을 만나볼 기회는 좀처럼 없었던 셈이다. 새삼 서울의 넓이와 역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북촌의 지형은 남쪽이 낮고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며 골짜기가 형성돼있다. 물길은 자연스럽게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다. 북촌 한옥마을은 자연의 지형 위에 그대로 살포시 앉아있다. 산세의 경사를 따라 앞집과 뒷집의 높이가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앞집이 뒷집의 전망을 가리지 않고, 뒷집이 앞집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길은 물길과 나란히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다. 남저북고의 형상에 따라 큰길들은 남북으로 나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도시설계다. 오늘날이라면 지형을 변형해 평탄화하고 넓이에 따라 구획을 나눴을 것이다. 현대의 재개발 방식대로 북촌을 개발했다면 건물과 문화만이 아니라 지형과 풍경까지도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정교수님의 설명이었다. 


한양의 중심부였던 북촌은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다. 1906년 호적자료에 따르면 북촌 전체인구 10,241명(1,932호) 중 양반과 관료가 43.6%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까지 그 위상은 이어졌다. 서울에 남아있는 유일한 99칸 저택인 윤보선가나 부호로 유명한 인촌 김성수의 자택도 북촌에 남아있다. 그러나 오늘날 북촌의 기반은 당시 양반들의 저택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도시의 인구집중 현상이 일어나면서 서울에서는 주택난이 벌어졌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기는 법. 1912년 이후 민간 주택경영회사들이 등장하면서 중대형 필지를 분할해 소형의 대량 한옥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현대 대표적인 한옥밀집지역은 모두 이 시기에 생겨난 한옥주거지이다. 이 때문에 현재 북촌의 한옥 대부분은 전통한옥이라기보다 개량한옥, 생활한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이 시기에 1차 북촌재개발이 이뤄진 셈이다. 이런 면에서는 전주한옥마을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주한옥마을 역시 20세기 초에 형성된 거주지로, 다양한 형태의 한옥들이 공존하고 있다. 전통이라는 것은 박제처럼 그대로만 유지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개량이 이뤄지고,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변화한다. 북촌과 전주의 한옥들은 그 과도기의 주거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당대에는 최신의 재개발 주거단지였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북촌한옥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1970년대에 걸쳐 시행된 강남개발의 여파로 강북의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자 빈 부지가 생겨났고, 그 자리엔 커다란 현대식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저층의 작은 한옥들이 밀집해있던 북촌의 풍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행정기관에서는 북촌의 한옥을 보존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한옥보존정책을 시행했고, 주민들은 이에 반발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건축기준 완화요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시가 규제를 완화하면서 한옥이 헐리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며 북촌경관은 급격히 훼손되기 시작했다.


이 때 나온 것이 바로 북촌 가꾸기 정책이다. 민간단체인 (사)종로북촌가꾸기회의 요구로 시작해 서울시는 연구기관을 통해 정책을 수립했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옥을 보존할 수 있는 지원책을 내놓았다. 한옥등록제를 근간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되 현대적 필요를 반영하도록 수선을 유도했다. 마을 환경 개선에도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이어졌다. 달라진 북촌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며 서울의 명소로 거듭났다. 한옥의 가치를 알게 된 주민들의 한옥선호도와 참여도는 더욱 높아졌다. 같은 목표를 가진 보존정책이 이처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소통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살기 위한 한옥, 보여주기 위한 한옥


우리 일행이 북촌을 찾은 날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함께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관광객을 위한 상업시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직접 들어가서 안을 살펴볼 수 있는 한옥도 많지 않았다.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윤보선가나 김성수가도 대문 밖에서 살피는 게 전부였다.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북촌한옥마을은 여전히 주거가 중심이 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상업시설과 편의시설이 적어서 불편하거나 심심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층층이 쌓여있는 한옥지붕을 보고, 골목을 수놓은 담벼락의 무늬들을 보고, 여전히 개성을 간직한 집집마다의 문패와 우체통을 보노라면 나도 이런 마을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주에서 찾아간 입장에서 전주한옥마을과의 비교를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북촌과 전주의 한옥마을은 둘 다 전통한옥이 아닌 20세기 초의 생활한옥이 중심이 된 공간이고,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일방적인 한옥보존정책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컸던 것도 공통점이고, 2000년대에 들어서며 재개발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활로를 모색한 것도 같다. 둘 다 오늘날 관광명소로 새롭게 떠올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둘의 미래도 같을까? 북촌을 돌아본 후 그 가정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주거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전주 한옥마을은 상업시설과 편의시설의 비중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다. 지금의 관광객들이 언제까지고 한옥마을을 찾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두 한옥마을의 미래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관광객이 줄어든다고 북촌의 주민이 갑작스레 빠져나갈 우려는 별로 없다. 하지만 상업시설 중심의 전주한옥마을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튼튼한 주민공동체야 말로 마을을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이다. 오래된 고민이지만, 전주한옥마을의 내일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담장이 낮아진 마을, 소통하는 주민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했던 북촌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의 서원마을이었다. 유명한 암사동의 선사유적지 바로 인근에 위치한 평범한 마을이다. 유적지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닌 이 마을을 찾은 이유는, 북촌 한옥마을에서의 고민과 맞닿아있다. 부수고 다시 짓는 재개발이 아니라, 보존하고 개선하는 도시재생을 위해서는 행정의 지원이나 전문가의 조언보다 주민공동체의 의지와 참여가 더 중요하다. 서원마을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아파트가 중심인 우리나라 도시인들에게 단독주택이 주는 이미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외의 전원주택이고, 담장이 맞닿아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노후한 도시 단독주택이다. 서원마을은 후자의 단독주택단지였다. 건물은 노후하고 주민들은 고령화돼 재개발의 요구가 높아지던 차에 서원마을은 다른 선택을 했다. 2008년 시작된 살기좋은 마을만들기형 지구단위계획 시범사업에 공모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간 공사는 없었다. 주민들과 전문가, 행정기관이 모여 우리마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보존할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함께 마을을 바꿔갈 수 있을지 치열한 토론과 공부가 이어졌다. 그리고 2011년에서야 비로소 기공식이 열렸다. 으리으리한 시설이나 화려한 장식은 없었다. 담장을 낮추고 길가에 주차된 차를 마당으로 들였다. 마을커뮤니티의 중심이 될 마을회관이 들어서고 주민들이 함께 쓸 놀이터와 휴게시설이 만들어졌다.


담장을 낮추고 차를 마당으로 들였을 뿐인데, 평범했던 단독주택단지는 마치 서양식 전원주택단지처럼 변했다. 집은 전주에서도 흔히 보던 형태인데 담장의 변화만으로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변화는 주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처음 담장을 낮추길 꺼려했던 주민들도 달라진 마을의 모습에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다. 훤히 드러난 마당에 꽃과 채소를 심어 가꾸고, 낡은 건물을 자발적으로 수리했다. 사업 준비과정부터 꾸준한 소통을 이어갔던 주민협의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민 공동체가 형성됐고 서로의 대소사를 돌봐주는 문화가 되살아났다. 


그간 마을만들기 사업은 주로 농촌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인구의 절대다수가 도시에 살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마을공동체의 재생이 더 필요한 곳은 도시일지도 모른다. 서원마을의 이야기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심어줬다. 답답한 담장 대신 탁 트인 정원과 텃밭이 주민과 행인을 반기는 그런 도시 말이다.  

황재근 문화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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