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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시 핀 녹두꽃, 그 위에 서다
여행장소 153회 백제기행 - 다시 갑오년, 녹두꽃이 핀다
작성자 최다미
기행일 2014-04-19

다시 핀 녹두꽃, 그 위에 서다


153회 백제기행 - 다시 갑오년, 녹두꽃이 핀다

고창, 정읍, 부안 일대 동학농민혁명사적지



나는 중고등학교시절 국사를 좋아하고 또 나름 잘한다고 자부하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해선 ‘조선 말 어지러운 국정 속에 생긴 신흥종교 중 하나’로 치부하며 역사책의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었다.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동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오히려 지극히 사소한 시작이었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 중이던 내게 동학은 하나의 기삿거리였다. 학술코너를 맡고 있는 나는 120주년을 맞았다는 동학이 나름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우선 기획을 맡은 나부터도 동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좋은 기회가 생겼다. 마당에서 주최하는 백제기행에서 동학기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접했다. 역사기행이라니, 고등학교 때 현장학습이후로 무언가 지식을 배우고자 떠나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설렘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선봉, 고창


시험기간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가는 기행이었지만 설렘이 더 컸다. 함께 가는 일행이 있기도 해지만 내 고향, 내 선조들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또한 내가 제대로 알아야 좋은 기사를 기획할 수 있다는 마음도 한몫했다. 이참에 제대로 배워갈 심산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고창에 위치한 ‘무장기포지’였다. 이곳은 사실 고부농민봉기가 민란에서 투쟁으로 전이된 역사적 공간이다. 이곳의 넓은 터는 당시 무장농민들의 훈련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무장창의 당시 선언한 포고문이 무장창의포고비에 쓰여 있는데, 당시의 명문답게 창의의 목적과 의도가 분명히 들어난 글이었다. 모르고 왔다면 보고 홱 지나갔을 곳인데 재밌게 설명해주시는 이광재 작가님 덕분에 이면의 이야기들도 얻어갈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고창에서 동학을 이야기하는데 전봉준을 빼놓으면 섭하다. 현재 죽림리 당촌에는 전봉준 생가와 함께 ‘녹두새야 울지 마라’는 전봉준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재현한 모습이라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느끼기는 어려웠으나 ‘쇠화로’라 불렸던 전봉준의 어린 시절 당찬 모습들을 들으며 영웅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지나간 자리, 정읍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고부농민봉기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현재는 향교만이 남아있을 뿐 당시의 관아자리에는 학교가 세워져 있었다. 당시 고부는 풍부한 물자를 지닌 고을이었고 이 때문에 동시에 수탈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조병갑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조병갑이라고 하면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된 탐관오리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나 실제로 조병갑은 백성들이 자비로 선정비를 세웠을 만큼 어진 관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까지 그 성정을 유지하지 못했는지 결국엔 역사의 악인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참 서글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봉준 고택에 들르기 전 부안에 백산대회 터에 들렀다. 평소 체력이 좋지 않던 내게 산을 올라가는 일은 고역 그 자체였다. 그래도 높은 곳에서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니 기분도 상쾌해졌다. 동학농민군들이 기포 후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들고 모여 있다 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했다.



정읍엔 전봉준 장군이 사발통문 거사 때 살았던 고택도 있었다. 전형적인 초가삼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전봉준 장군이 동학농민운동에 관여하면서 주변 가족들도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나중에 전봉준 장군에 대해 연구하던 이와 전봉준 장군의 딸이 만났던 이야기는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한동안 폭도들로 기록되어야 했던 선조들 때문에 오랜 시간 맘 졸이고 숨어 살아야했던 그들의 삶이 안타까우면서 미안했다. 왜 좀 더 우리는 그들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정읍의 마지막 유적지이자 우리 기행의 헤어짐이었던 만석보도 동학농민혁명에서 중요한 장소이다. 조병갑의 과도한 물세가 농민들로 하여금 항의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도 자세히 살펴봐야 할 문제가 있다. 물론 기존에 받기로 했던 물세보다 조병갑이 더 많이 받은 것은 분명히 잘못된 문제이지만 노동력 착취라던지 농민들의 생계를 팽개치고 일터로 내몬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 가뭄으로 농사에 어려움이 생기자 남는 인력을 보 건설에 투입하였고 결과적으론 가뭄 해소에 기여한 바가 있었다. 이처럼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몰랐던 지식들을 나는 어느새 기행을 하면서 하나씩 쌓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당신의 기억에서 희미하십니까? 


기행의 끝자락에 들렀던 황토현 기념관에서는 눈부시게 노란 유채꽃에 물든 동학농민혁명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기념관에는 동학농민혁명의 발발부터 의병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알기 쉽게 담겨있어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흥미와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번기행을 끝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루 만에 유적을 다 돌았다고 해서 내가 동학에 모든 것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이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더 이상 동학농민혁명이 외로이 홀로 핀 녹두꽃이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이 의식이 저물지 않고 오래도록 그 곁에 머무를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수많은 녹두꽃의 기반이 되었으면 한다.  


최다미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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