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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랑새는 산을 넘고
여행장소 157회 백제기행_다시 갑오년, 동학기행 셋 :임실, 남원, 순창 일대 동학사적지
작성자 방재현
기행일 2014-08-23




동학기행 셋, 파랑새는 산을 넘고


동학기행 세 번째 여정은 임실, 남원, 순창의 유적지를 찾아간다. 행선지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에 젖어 새벽잠을 설쳐야 했다. 특별히 이번 여정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책임연구원인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이 함께하여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이끌며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일행의 견문을 넓혀 주었다.

 

봉기 후 재건의 주축이 된 임실을 돌아보고


오전 8시 30분 전주종합경기장, 출발하기 전 차창의 시야가 충분히 확보된 자리를 잡아 보았다. 얼마지 않아 버스가 출발하며 서서히 남하가 시작되었고 임실에 가까워지자 평야지대가 멀어지면서 도로 양옆으로 산들이 지나간다. 첫 번째 목적지는 임실군 운암면의 운암초등학교 정문 앞에 위치한 ‘3대 기념비’다. 기념비들이 나란히 서서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그리고 무인년의 멸왜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기념비의 의미를 살펴보고 동학농민혁명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며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실에서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삼요정(三樂亭)이다. 삼요정은 임실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영원이 1883년에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설립하였고 192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가 2002년에 이르러 지역주민들과 임실군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다.


유림이었던 김영원은 동학입교와 갑오년의 봉기를 전후하여 스스로 단발하고 개화에 앞장서 다가 사재를 털어 신식문물을 가르치는 학교들을 세워 나간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했고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제자들을 일선에 세우고 배후에서 주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왜경에 의해 체포되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 뜻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가르침에 충실했던 삼요정은 2003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일행이 삼요정을 찾았을 때는 김영원의 증손인 김창식(67)씨 내외가 따뜻하게 맞아 주며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중에서는 김영원의 살아생전에 기거하는 식솔들만 20여명이 넘었고 본인은 말을 타고 서울을 오가는 등 인근에서 알아주는 대부호였지만 정작 이후의 후손들은 학교의 문턱을 밟아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시원한 음료를 대접받은 일행은 삼요정의 툇마루에 잠시 앉아 땀을 식히고 갈 길을 재촉했다.


갑오년 거사로 인한 여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임실에 비해 남원일대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남원의 대접주였던 김홍기의 일가는 3.1운동에 이르는 과정에 멸문지화를 당할 뻔 했다. 지금은 자손이 번성하여 임실 삼계면 삼은리 내의 한 곳에 일가족의 묘역을 꾸려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묘역이 단장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주변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격변의 시기, 김홍기 일가가 겪어야 했던 사연은 남원의 유태홍과 더불어 조만간 다시 정리되어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김홍기의 일가족 묘역을 지나 임실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일행은 남원을 향해 출발했다.




전라좌도 농민군의 중심이었던 남원을 지나


남원으로 향해갈수록 노령산맥의 줄기가 섬진강의 지류와 만나 장관을 이루기도 하며 산세가 제법 험해졌다. 남원에 도착해 추어탕으로 든든하게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은 교룡산성으로 향했다. 교룡산성은 갑오년 봉기 이후 김개남과 농민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가까운 곳의 은적암은 동학교조 최제우가 은거하며 포교와 저술활동에 힘쓰던 곳이기도 하다.


농민군 지도자중 하나였던 김개남은 정읍 태인사람으로 원래이름은 기범이었으나 동학입교후 남쪽을 개혁한다는 뜻의 개남(開南)으로 개명하였다. 소싯적 공부에 큰 뜻이 없어 기개를 펼치다 동학에 가담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여 전주화약 이후에는 남원을 중심으로 하는 전라좌도를 통괄하였다. 덥수룩한 수염과 산발한 머리,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거친 사내는 전장에 나아갈 때면 언제나 선봉에 서서 씩씩대는 숨소리를 내뱉고 무리를 독려하였을 것이다. 그의 호쾌하고 거침없는 행보는 멸시받고 차별받으며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고 전주장대에서 참수 당하므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일행이 산세를 느끼고자 조금이나마 고지를 오르자 남원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오랜 기간 역사의 중심에서 천혜의 요새로 자리매김했던 교룡산의 기운을 받으며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주둔했던 농민군의 위용을 가름해 본다.



교룡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던 방아치전투지다. 2차 봉기로 김개남이 주력군을 이끌고 북상한 사이, 농민군의 기반이 약했던 운봉의 지방 문벌 방위군인 민보군이 인근의 관군과 연합하여 진격해왔고 농민군이 이에 맞서면서 방아치는 물론 여원치, 관음치, 운봉과 산동 및 남원의 경계 일대가 전장이 되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28시간에 걸쳐 펼쳐지며 치열한 공방이 오갔으나 관군이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농민군은 2천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기세를 탄 민보군은 연이어 남원에 입성했고 여기저기서 약탈을 일삼았다는 불미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만다. 산들로 둘러싸인 평원에 가득히 울려 퍼졌을 함성과 이어졌을 신음들이 들려오는 듯 잠시 적막이 훑고 지나갔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과 해방이후 남원에서 건국을 준비하던 공으로 1990년 국민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유태홍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일가족이 고초를 당하기 전, 일찌감치 동학 농민혁명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공동으로 유태홍의 묘 입구에 비석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고 있었다. 묘소 주변은 제법 수풀이 우거져 산모기들이 보이지 않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유태홍의 행적에 대한 재조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남원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녹두꽃 지는 해, 순창으로 간다.


이제 순창으로 간다. 순창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산등성이를 타고 가자 기압차 때문인지 귀가 멍멍해진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 한참을 달려 찾아 온 곳은 전봉준 장군 피체지(被逮地)였다. 우금치에서 대패한 후 일본군과 관군에 쫒기다 무리가 모두 흩어지자 전봉준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순창으로 향한다. 그러나 일신의 영달에 눈이 먼 측근의 밀고로 말미암아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체 끌려가야 했고 서울로 압송되고 만다. 무수한 고문과 심문에 의연히 맞서던 전봉준은 죽음의 순간에 다다르자 다음과 같은 유시(遺詩)를 남겼고 파랑새는 산을 넘었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멀리 구름 너머 하늘 아득한 곳, 정자에 둘러 앉아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땅에서는 아이들이 맑은 눈으로 밝게 웃으며 힘차게 뛰어놀고 있었다.


방재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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