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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북동, 서울의 나이테
여행장소 163회 백제기행 - 도시문화기행 셋 : 서울 성북동
작성자 윤지용
기행일 2015-03-21

오래 전에 몇 년 동안 서울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서울의 웬만한 곳들은 거의 구경 다녔었는데, 성북동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TV 드라마들에서 얻은 무지한 선입견 탓이었을 것이다. 재벌회장님은 ‘성북동 어르신’, 도도하고 깐깐한 귀부인은 ‘성북동 사모님’으로 불렸던 드라마들 덕분에 성북동을 ‘부자들이 저택을 짓고 사는 동네’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성북동에 대한 더 오래된 기억도 있기는 하다. 중학교 때였던가,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 시를 제대로 읽고 느끼는 것을 배우기보다는 “김광섭은 주지주의” 이런 식으로 무작정 외웠었다. 물론 주지주의가 무슨 말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성북동에 대한 나의 사전지식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최소한의 ‘예습’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책꽂이 귀퉁이에서 다소곳하게 먼지이불을 덮고 있던 2002년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꺼내 다시 읽었다. 사실은, 읽으려고 노력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기행문을 떠맡긴 ‘그분’의 안목을 개탄하면서.

성북동에 도착해서 맨 먼저 들렀던 곳은 길상사(吉祥寺)였다. 길상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이 절집을 시주한 여인의 법명 ‘길상화’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다. 시주를 받아 이 절을 창건한 법정스님이 몸담았던 순천 송광사의 옛 이름이 길상사였고 스님은 ‘길하고 상서롭다’는 뜻의 그 이름을 몹시 아끼셨단다.
삼 년도 채 못했던 백석과의 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김영한. 그가 천억 원대에 달하는 요정 대원각을 절터로 시주하면서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한 돈”이라고 했다는 일화에 괜히 가슴이 찡하다. 자야(子夜)이자 나타샤였다가 나중에 길상화가 되었던 그는 자신의 유골을 눈 오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달라고 했단다. 왜 하필 “눈 오는 날”이었을까? 눈이 푹푹 나리는 날에 응앙 응앙 흰 당나귀 울음 들으며 혼자서 소주를 마셨을 ‘그 사람’ 때문이었을까?

길상사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극락전 옆 마당에 핀 노란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던 사람이 ‘복수초’라고 꽃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러해살이 나무의 높은 가지에 만발하는 꽃들보다 낮은 흙바닥에 외따로 피는 풀꽃들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

골목길을 돌아 최순우 선생의 옛집을 찾아갔다. 재개발 붐으로 헐릴 뻔했다가 내셔널 트러스트(국민신탁) 운동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보존되었다는 그 집은, 그래서 ‘시민문화유산 1호’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서울경기지역 근대 한옥의 전형인 ‘ㅁ’자 모양으로 지어진 최순우 옛집은 선생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우리 고건축에 대해 묘사했던 그대로 ‘조촐하되 의젓’했다. 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는 옛말이 실감나는 그 집의 구석구석에 단아하고 정갈했을 선생의 기품이 배어 있었다.

건듯 봄바람 부는 대청마루에 앉아 차 한 잔 마시고 싶었던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아쉽게도 5월초까지 내부수리 중이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대문 밖의 구석진 곳에 서서 담배 한 개비 피우면서 그 집의 옛 주인을 생각했다. 이태준은 1930년대에 성북동에 처음 이사와서 쓴 단편 <달밤>에서 “시냇물 소리와 쏴하는 솔바람 소리 들리는 시골”이라고 했었다. 6.25전쟁에 인민군 종군기자로 참전한 후 북으로 갔다가 숙청당해서 함경도 어디의 시멘트공장 노동자로 살다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고 했다. 더러 인간이 이념을 저버리기도 하지만, 이념이 인간을 배신했던 적이 더 많지 않았던가?

만해 한용운 선생의 거처였던 심우장은 듣던 대로 북향이었다. 남쪽에 있는 총독부 건물을 바라보기 싫어서 일부러 북쪽을 바라보도록 지었다는 설명도 일행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한옥으로 된 본채와 어울리지 않는 신식 철대문과 마당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슬라브 양옥 ‘사무실’은 약간 생뚱맞았다. 심우장 골목길을 내려와 큰길가로 나왔더니 선생의 동상이 있었다. 긴 벤치 같은 의자에 선생이 앉아 있는 좌상(坐像)이었는데, 잠깐 옆 자리에 앉아보았다. 반듯하게 다문 입술과 굵은 주름살, 무채색의 동상인데도 형형한 눈매. 지사적인 풍모와 결기가 가만히 느껴졌다.

사실 절집이나 고택 같은 문화재들보다 내가 더 관심 있었던 것은 언덕을 따라 이어진 좁은 골목길들이었는데, 제한된 시간에 일행들과 함께 움직이다 보니 느긋하게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니지는 못했다. 그 대신 도시환경전문가 유나경 소장과 ‘성북동천’의 최성수 선생께 성북동의 역사와 마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전직 교사이자 시인인 최 선생은 <성북동 사람들 이야기>라는 마을 잡지의 편집장이신데, 대대로 성북동을 지키며 살아온 토박이였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에 초등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가면 학부모들이 교가를 함께 불렀다. 학부모들도 대부분 성북초등학교를 나온 동문들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오래 남는다. 전주만 해도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을 따라 떠도는 ‘유목민’들이 태반인데, 명색이 ‘서울특별시’에 이런 동네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애초에는 ‘재개발 저지투쟁’에 힘을 쏟았다가 ‘문화가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철거할 수 없는 마을’을 만드는 일에 눈을 돌렸다는 ‘스페이스 오뉴월’ 젊은 대표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성북동 177-17번지 지하실에 터를 잡고 ‘갤러리 17717’을 운영하고 있는 김선문이라는 젊은이와 그의 친구들은 씩씩하고 사랑스러웠다. 솜사탕 장사를 하다가 솜사탕에 끼우는 막대가 그냥 버려지는 게 싫어서 나무젓가락 대신에 빼빼로를 끼워서 ‘막대까지 먹는 솜사탕’을 개발했다는 재기발랄한 청춘들. 그 말랑말랑한 상상력!
내가 ‘마을 만들기’나 ‘문화’ 같은 분야에 전혀 문외한이기도 하거니와, 고작 반나절 남짓의 탐방으로 성북동의 속살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기껏 멀리서 찾아간 손님들이 행여 실망할까봐 긍정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어쨌든 ‘지속가능한 성북동’을 위한 그들의 진지한 고민과 고단한 노력만큼은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수백 년 묵은 성곽에서부터 다양한 근대문화유산들, 대를 이어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토박이 주민들과 톡톡 튀는 청년 문화활동가들까지 옹기종기 어울려 지내는 성북동은, 어쩌면 서울의 ‘나이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북동은 그 자체가 이미 박물관”이라는 스페이스 오뉴월 대표의 말에 은근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성북동 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가 청계천을 지났다. 하루에 1만 2천 톤의 한강물을 끌어다가 흘려보낸다는 인공의 물길, 콘크리트 신화의 상징물. 때마침 석양 무렵이어서 청계천의 자잘한 물결들 위로 노을이 반짝거렸지만,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글.윤지용(은빛기획 전북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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