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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촌' 그때, 그 시절이 머뭇거리는 곳
여행장소 180회 백제기행 - 도시문화기행 열여덟: 서울
작성자 이정우
기행일 2016-12-17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옛날의 풍경이 머뭇거리는 곳, 서촌. 빽빽한 서울도심에 자리 잡은 동네 서촌엔 정겨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만든 좁은 골목길이 있다. 옛날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며 어깨를 스쳤던 곳이지만 지금은 낯선 사람들이 스치며 한적하게 걷는 동네다.
서촌은 최근 SNS를 통해 숨겨진 맛집들이 많이 알려졌고 경복궁, 현대미술관, 대림미술관처럼 한국의 문화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안 윤동주와 이상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주민이었다.
고즈넉한 옛 시절의 풍경과 현대의 세련미를 경험하고 싶다면 지금 바로 서촌으로 가는 여행 계획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180회 백제기행이 그곳 서촌을 먼저 다녀왔다.



음식 문화 들여다보기 <미각의 미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미각의 미감>이란 흥미로운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도시를 생동하게 하는 음식 문화를 통해 재발견되는 삶과 예술 그리고 공동체를 주목하는 전시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음식 문화 전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서촌에도 SNS를 통해 맛집이 많이 소개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삶을 성찰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게 하기보다 문화산업의 가장 뜨거운 아이템으로 소비되고 있다. 
오늘의 음식문화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맛'의 경험에 탐닉하는 감각의 소비 행위에서 벗어나 씨앗을 심고 키우는 식재료의 생산에서부터 도심 속 장터에 모여 먹거리를 사고팔며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 행위를 통해 '도시'라는 장소를 재발견하면서 삶의 관계를 재조직한다. 더불어 농부와 요리사가 함께 재료를 연구하며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동체 문화를 확장해가고 있다. 
음식을 통해 경험해 온 미각(味覺)을 단지 감각 충족의 수단이 아닌,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를 이어주는 사회적 매개로서 접근한 이번 전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장소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도시의 미감(美感)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작품들이 잠시 머물러가는 곳. <보안여관>
경복궁 돌담길 길 건너에 있는 보안 여관은 작가들이 빚어낸 작품들이 며칠 동안 머물러 있는 곳이다. 1940년대부터 80년의 세월을 굳건히 지켜낸 보안 여관은 서정주, 김동리 등 문학인들이 한국최초의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다.
보안 여관은 현대 사회 혹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함께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 전시된다. 하루를 마치고 고된 몸을 쉬던 사람들이 머물렀던 이 곳의 변신은 놀랍다. 그래서인지 깔끔하고 세련된 갤러리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이 곳은 개방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전한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전시공간과 작품들은 의외의 조화로 관객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현재 보안여관에서 전시 하고 있는<프랑스 현대미술>은 제목 그대로 프랑스의 현대 미술과 감수성을 담은 작품들을 전시이다. 보안 여관 공간의 분위기가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들과 어우러진 전시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예술을 통해서 유럽과 한국의 정서가 국가적인 차원을 떠나 인간적인 감수성으로 조화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생명과 욕심의 흔적 <통의동 백송터>
나무는 뿌리가 한번 내리면 땅과 함께 숨을 쉰다. 그래서 땅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무는 쉽게 죽지 않는다. 백송터를 보면 그러한 사실이 더 절절히 느껴진다.
나무의 키는 16미터, 나이는 600여 년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나무가 쓰러진 뒤인 1994년에 분석한 결과 1690년경에 심은 것으로 밝혀졌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성장이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는 말이 있다.
1991년 봄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날 조짐을 보였지만,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상태가 악화되었다. 1993년 노태우의 임기가 끝나고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그해 5월 13일에 나무가 잘려 나갔단다.
밑동만 남은 백송터에 자리 잡은 나무는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듯 윤기가 있고 나무 주변에는 풀들이 자라나고 있다. 땅에서 풀이 자라난다는 것은 아직 땅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고 땅이 살아있는 생명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가 본 백송터는 서울이라는 큰 도시 중심에서 나무의 생명력과 자연의 인내심을 온전히 확인시켜주었다. 



숨 쉬는 공간 <이상의 옛 집터>
이름이 많이 알려진 유명인들은 나라에서 문화적으로 지원 한다는 명분으로 문학관과 같은 문화적인 장소를 제공한다. 작가 이상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작가 이상의 집에 가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있지는 않다. 아마도 문학 혹은 문화, 예술이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이상의 집'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간이다. 텅 빈공간이지만 무게 있는 색감이 있는 공간이어서 사람들은 잠깐이라도 엄숙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작가 이상이 문학관이 아닌 집이라고 공간의 이름을 만든 것도 사람들이 그런 공기를 한번쯤은 맛 볼 수 있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엽전으로 사먹는 시장 <통인시장>
일반적으로 시장은 엄마들의 공간이다. 엄마들은 가족들을 위해 심사숙고하여 음식을 결정하고 진지하게 재료를 선택한다. 그런데 통의동 통인시장은 엄마들이 주된 손님들이 아니라 친구들, 연인 혹은 가족들이 먹거리를 즐기기 위한 시장이다.
통인시장에서 사람들은 음식 재료를 사지 않고 서울 야시장처럼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 물론 예전에는 엄마들이 식자재를 사는 곳이었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서촌이 맛집이나 카페 등등 젊은이들의 거리로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시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걸으면서 간식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싶다면 통인 시장에 가서 엽전을 들고 이런 저런 음식들을 먹으면 어떨까.


굴곡진 역사의 흔적 <윤덕영 집터>
골목에서 문득 기둥 하나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여기 저기, 모두 3개의 기둥이 숨어있다. 바로 윤덕영 집터의 대문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중인들의 문화적 아지트였던 '송석원'은 시간이 지나 권문세도가들에게 쓰이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윤덕영의 커다란 별장영역에 포함되고 만다. 윤덕영은 순종 황제의 황후인 순정효 황후 윤씨의 큰아버지로, 친일과 매국으로 큰 부귀영화를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별장에는 커다란 한옥들 외에도, '한양의 아방궁'이라 부르는 양식건물인 '벽수산장'이 있었다. 윤덕영은 프랑스 공사로 갔던 민영찬이 사두었던 건물의 설계도를, 나라가 망한 후 일본국왕에게서 받은 은사금으로 사들여 3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했다.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옥인동 위쪽에 자리한 양풍의 건물은 해방 후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사진속 '벽수산장'은 어마어마한, 흡사 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를 마주한 순간 역사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화백의 숨결이 살아있는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한국화가 박노수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인지 박노수 미술관은 겨울 답사가 더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삐걱거리는 마루는 왠지 정감 있다.
1973년 박노수 화백이 이 가옥을 인수하여 거주하였고, 사망하기 전인 2011년에 종로구에 자신의 작품, 고미술품, 고가구과 함께 기증해 보수를 거친 후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박노수 화백의 기증 작품과 컬렉션 등 총 1,000여점의 풍부한 소장품을 소장하고 있다. 화백이 40여 년간 거주하던 집에 아름다운 미술관을 만들었으며 계속해서 미술관 소장품을 활용한 전시와 다양한 전시연계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그가 그려온 한국의 산이 있는 풍경과 물이 함께 채색된 많은 풍경화들이 지금 그림을 그리며 작가를 꿈꾸는 많은 아이들에게 큰 의미로 남는 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미술관이다.


한적한 도심속 계곡 <수성동계곡>
별을 헤아리며 아침 새벽을 맞이했을 시인 윤동주가 밤에 몸을 뉘었던 하숙집. 종이와 연필로 맑고 깨끗한 그의 생각이 쓰여 졌을 하숙집을 다녀왔다. 젊음의 시작에서 생을 마감한 그가 머물러 있던 곳을 지나 수성동 계곡으로 올라갔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 때 이 일대에 흐르는 계곡물의 소리가 맑아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다. 겸재 정선이 그린 산수화에 수성동 계곡이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인왕산을 등지고 흐르는 계곡은 희고 거친 돌들이 계곡을 만들고 있었다. 굵은 계곡의 바위엔 많은 상처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안가는 모습으로 빌딩숲을 이루고 있던 이곳. 옥인시범아파트의 흔적이었다.
서울 안에 숨어 있는 계곡 옆에 있는 정자에 한 낮에 여유로이 앉아 있으면 사람들 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고 새소리 혹은 나무들이 흔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자연과 벗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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