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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업전사 광부들의 전쟁터, 그 미래를 만나다
여행장소 183회 백제기행 강원도, 과거로의 시간여행 - 광산의 흔적과 광부의 애환
작성자 박성원
기행일 2017-04-15




한국 정부는 국내 경제성장을 위하여 1962년부터 198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1982년부터는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1996년까지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기간에는 전력, 석탄 등 에너지원을 확보하고 기간산업의 활성화에 중점을 둔 기간으로, 이 시기에 석탄 산업이 최대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57년 이후부터 약 10년간은 한국 석탄산업의 최고 황금기였으며 탄광개발이 활성화 되며 탄광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고 광공업은 고속성장을 하였다.
석탄 산업은 ‘석탄생산 5개년 계획, 10개년 계획’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였고, 특히 1969년 ‘석탄광업 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석탄증산과 수급조절을 위한 강력한 사업자금지원이 가능하게 되어 석탄 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석탄증산정책으로 크게 늘어나는 국내 산업용, 가정용의 에너지 요구량을 충당할 수 있었다. 년도 별 석탄 생산량을 보면 1954년에는 88만8천 톤, 1960년에는 5백35만 톤, 1965년에는 1천25만 톤, 1971년에는 1천2백 78만 톤으로 꾸준히 생산량이 늘어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1969년 및 1970년〈광업통계조사보서〉에 의하면 석탄생산액의 광업전체에서의 비중은 52.39%에 이를 정도로 국내 산업 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정선군의 경우 1972년 대한탄광협회의<炭協>자료에 의하면, 예상매장량이 436,760천 톤으로 전국 예상매장량의 37.45%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1989년대부터 도시가스와 같은 청정연료의 보급으로 에너지의 소비 패턴이 갑자기 크게 변화하는 ‘에너지 혁명’ 현상과 ‘석탄합리화정책’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바뀌면서, 석탄 수요는 저하되었고 그에 따라 채산성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가정용 연탄의 수요 감소, 또한 심부 채굴과 임금 상승 등 계속되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폐광이 증가하였다.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1995년에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특히 탄광이 밀집해 있는 태백산 일대를 중점으로 종합 관광단지로 조성하려는 지역 재생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 최근 강원도 정선군에 건설된 강원랜드는 이러한 차원에서 정부가 조성한 지역 개발 사업이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많은 사회기반시설이 낙후되고 탄광개발로 자연환경이 많이 파괴된 이 지역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
탄광의 도시 태백. 과거 ‘한강의 기적’을 일군 광부들이 살던 곳. 폐광 후 수많은 문제점이 남겨진 이 지역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현재도 많은 전문가와 연구자, 지역주민이 함께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아시아 민영 최대 규모, 동원탄좌사북광업소
하이원리조트 입구에 위치한 사북석탄유물보존관(탄광문화관광촌). 1960년에 탄광개발을 시작하여 2004년에 폐광된 탄광이며, 23개 광구를 소유한 동양 최대 민영 탄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탄광역시 석탄 합리화 정책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폐광되고 말았지만, 현재는 탄광문화를 알리고 체험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중요한 역사시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처음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높이 48m의 거대한 수갱타워(수직 갱도)가 위용을 드러낸다. 수갱은 크게 ‘운반용’과 공기순환을 위한 ‘통기용‘이 있는데 이 수갱은 운반역할을 하던 것이라고 한다. 전시관 입구에는 ’나는 산업전사 광부였다‘라는 투박한 문구와 그 위에 환하게 웃고 있는 광부의 얼굴 그림이 있다. 같이 기분 좋게 웃을 수 없었다. 많은 광부들의 애환이 깃든 주변의 남겨진 시설과 분위기에 가슴 뭉클한 느낌을 받았다.
토요일이라 아쉽게도 전시관 구경은 하지 못했지만, 야외 전시장은 개방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본관동에 있는 전시관 사이의 건물 통로를 지나 뒤편으로 나가면 넓게 펼쳐진 야외공간에 광차와 인차, 버스 등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많은 철도 레일이 깔려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은색의 반짝이는 색이 아닌, 녹슬고 휘어진 모습이었다. 그 뒤편으로 꽤 큰 규모의 갱 내수 처리시설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엄청난 높이의 산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석탄을 채취하고 남은 폐 석탄을 쌓은 것이 산처럼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쪽으로 약 10분정도 걸어가면 사갱(경사 갱도)이 보인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650갱’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하지만 굳게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볼 수 는 없었다. 사갱 입구 오른편에는 오염된 지하수를 정화하는 시설이 끊임없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물의 색이 탁한 흙빛 이었으며, 조금 냄새도 나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신기한 광경에 문득 다른 세상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과거 우리유산을 활용하여 새롭게 활용하고 지켜나가려 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과 용기를 얻었다.


삼탄아트마인,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함백산 자락에 위치한 정선삼탄아트마인. 1964년에 탄광개발을 시작, 2001년에 폐광된 시설로서 현재는 대한민국 제1호 예술광산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이 시설은 독실 뒤스부르크의 폐탄광 재생 문화 복합 공간 졸페라인을 벤치마킹하여 계획된 시설로서, 남겨진 탄광 시설을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으로 적극 승화시킨 점이 인상 깊었다.
해발 832m위에 위치해 있는 삼탄아트마인은 한참이나 구부러진 언덕길을 올라가서야 처음 육중한 모습의 수갱타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 그런데 입구가 4층이다. 맨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관람할 수 있게 계획한 부분이 재미있다고 생각되었다.
맨 첫 번째로 본 것은 4층의 ‘아트 레지던시 Hotel’이다. 태양의 후예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은 실제 배우들이 숙박을 했던 장소로서 그 점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그 때 당시의 촬영소품이나 옷, 사진 등을 전시해 놓아 관람객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 다음 3층에서 ‘삼탄역사박물관’ 코너를 보았다. 삼척탄좌가 있던 시절의 숨겨진 40년의 역사를 한데 모아둔 엄청난 양의 탄광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자료실이었다. 언젠가 허가를 받아 며칠 묶으며 자료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 각종 전시관에는 원시부족, 고전악기, 진시황 병마 등을 테마로 한 전시 시설이 있었고 수장고 또한 유리벽으로 볼 수 있게 개방을 해 놓아 관람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였다. 2층 샤워장 시설에 있는 복도의 한쪽 벽에는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운영되던 시절 찍어놓은 사진들이 가득 있었다. ‘아버지 출퇴근 마중 나가기’, ‘사갱 출입현장’, ‘광부사택’, ‘각종 기념사진’ 등을 테마로 한 사진 전시를 보며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실감할 수 있었다. 1층에는 과거 광부들이 입고 착용하던 실제 옷과 장비들을 보고 입어볼 수 있는 체험시설이 있어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수갱타워 출입구 및 광부들의 대기 장소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었는데, 주변이 온통 검은 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석탄가루 먼지가 붙어 있는 것이었으며, 걸으며 발을 끌 때마다 검은 먼지가 날려 살짝 겁이 나기도 하였다.
‘우리는 가정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그 속에 직장을 사랑한다.'
수갱타워 출입구 앞에 붙어있는 푯말이다. 사명감을 가지고 국가와 가정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이 들어갈 때마다 같이 복창을 했던 문구라고 한다. 제대로 된 방호복과 시설도 없이 몇 백 미터 아래의 갱내로 들어가 채굴작업을 하시는 분들의 모습과 밥 먹을 때 환하게 웃으며 도시락 뚜껑을 여는 사진이 연결되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하여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1층 외부로 나오니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육중한 탄광시설의 몸체를 볼 수 있었다. 수갱타워와 권양기가 연결된 수많은 철선과 그 옆에 놓인 엄청난 크기의 펌프시설. 그 뒤로 현재는 스튜디오 및 공연시설로 개조된 넓은 공간.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제2수갱타워까지. 이색적인 시설과 분위기로 드라마 <유령>, <협상종결자> 등의 촬영대상지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적극적인 탄광시설의 활용으로 ‘2015 관광공사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100선’으로 선정이 될 만큼 활성화되어, 새로운 지역의 재생 방법의 하나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제도적 문제점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한 시도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했다는 점이 크게 인상 깊었다.


철암탄광역사촌,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백두대간 협곡열차와 중부내륙순환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철암역. 역에 내려 10분 거리에 위치한 철암탄광역사촌. 보존이 잘 되어있는 철암역두선탄장(국가등록문화재 제21호)을 포함 ‘까치발 건물’로 유명한 구 상가건물들은 지워져가는 탄광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까치발 건물은 좁은 주거 공간에 여러 세대가 살 수 있도록 하천 쪽에 기둥을 세워 증축했던 흔적으로, 당시의 애환을 잘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지금의 철암탄광역사촌은 구 ‘철암시장’으로 당시 늘어선 선술집과 가게들로 사람이 북적이던 곳이며, 광부들의 높은 임금 덕에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 전체가 리모델링되어 5개의 전시관을 통해 실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사진과 다양한 예술작품들이 어우러져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건물 밖의 간판들은 그 때 당시 사용했던 간판을 부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두었다고 하니, 그 현장감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시관은 특이하게 상점 이름으로 구분해 두었다. ‘페리카나’, ‘호남슈퍼’, ‘진주성’, ‘봉화식당’, ‘한양다방’으로 나뉘어져, 사료 전시관, 사진 갤러리, 전망대, 뮤지엄SHOP, 석탄의 방, 자연의 방 등 다양한 주제로 전시가 되고 있었다. 특히 호남슈퍼의 전망대에서 반대편으로 보이는 장성광업소의 위용은 충분히 관심을 끌 만했다.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니 기둥을 세워서 받친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붙여진 ‘까치발 건물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언뜻 보기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한 모습에, 방금 전까지 저 건물 안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 졌다. 건너편으로 건물 반대편을 자세히 보니 아이를 업고 있는 여인의 동상이 눈에 띄고 하수를 흘려 내보내는 수많은 플라스틱 파이프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철암탄광역사촌을 지나 오른편 멀리 작은 군락이 보였는데, 그곳이 예전 광부들이 살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산 중턱에 오밀조밀 모여 주택지가 형성되어있는 광경을 보며 당시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우리의 과제
과거 석탄 채굴을 목적으로 형성된 많은 탄광촌이 있었다. 특히, ‘탄광’하나만으로 ‘촌’이 생겨나고 ‘탄광도시’라는 용어도 생겨날 만큼 탄광산업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로인해 연계적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시설 및 상점가와 주거지들을 통하여 하나같이 과거의 화려한 모습과 역사를 엿볼 수 있었고, 석탄 산업이 융성했던 1960~70년대의 시기는 우리나라 광공업 역사에 큰 자리를 차지함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산업구조가 변하며 하나 둘씩 폐광이 진행되면서, 탄광촌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탄광산업’ 하나만 바라보고 형성된 ‘지역’과 ‘촌’은 다른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것은 없었다. 주요한 산업이 없어지며 속수무책으로 해체되는 마을과 사람들을 보며 많은 연구자들과 의식 있는 주민들이 노력을 하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1995년에 시행된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계획된 강원랜드, 곳곳에 숨어있는 각종 박물관과 예술문화 시설은 국가적 차원에서 탄광지역을 살려 보려고 노력한 흔적의 결과이다.
현재 국내에는 폐광지역과 관련된 수많은 지역 재생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 사례를 국내에 접목해 보려는 시도와 노력이 많이 보였지만, 지금까지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진행돼 보인 것 같아 아쉬웠다. 필자가 생각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성공사례와 현지 상황과의 ‘연결 작업’ 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국내 및 해외 사례가 그 지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와 연결된 각종 법적지원과 현지 상황에 맞는 치밀한 연결 작업 및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사례 하나만 볼 것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많은 요소들을 파악하고 적용시키는 방법이 어찌 달리 보면 제일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최근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사례 자체는 좋은데 그걸 우리 지역에 어떻게 적용시키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저 말에 응답하려면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례를 적용시키려는 지역의 현재와 과거의 인적 네트워크, 산업 네트워크의 파악과 과거로부터의 변화과정은 물론, 사례를 적용시키기 위한 법적인 검토도 필요하다. 또한, 관련 공무원들과 지역 활동가들의 유무 등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재생사업은 희망적이다. 고민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많은 분들이 계시기에 밝은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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