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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화 같은 풍경, 나를 깨우다
여행장소 184회 백제기행
작성자 문성희
기행일 2017-05-20



괘종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간 앨리스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하고 기이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몸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눈물의 연못에 빠지기도 하고 기묘한 동물들과 만나는 우습고 황당한 일을 겪는다.
지금의 나이를 사는 나는 지루하고 나른한 마음이 들 때, 앨리스를 떠올리며 이상한 나라를 상상하곤 한다. 이제 더 이상 몸이 작아져 환상의 모험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버린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꿈꾼다. 이상한 나라를. 그리고 떠난다. 이상한 나라를 향해


나무를 심은 사람

이상한 나라를 향해가는 제일 빠른 방법은 여행이다. 가끔 나는 훌쩍 혼자 여행을 떠난다.
언젠가, 먼 여행을 가는 나에게 누군가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을 선물해 줬다. 이 책은 한 젊은 여행자가 황무지에서 양치기 노인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노인은 자식과 부인을 잃고, 산에 올라 몇 십 년 동안 양을 키우고 벌을 치며 나무를 심어 왔다. 40년 뒤 다시 찾은 산에서 젊은이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 황무지가 푸른 숲으로 변해 있었고 아무도 살지 않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와 살고 있었다.
 남이섬. 그곳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었다. 경춘도가를 달리다 강에 떠있는 반달 모양의 섬에 마음을 빼앗긴 한 남자. 육지였다가 청평댐이 완공되면서 섬이 된 이곳에 그 남자는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 잣나무, 전나무, 백자작나무, 능수벗나무 등을 심었다. 그렇게 한 그루 한그루 심은 나무가 남이섬의 시작이 되었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아름드리나무가 빼곡한 아름다운 숲으로 변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동화(同化)되는 나라 
눈 쌓인 겨울, 남이섬을 여행했던 기억이 있다. 여름의 계절을 맞이한 남이섬은 그때와는 다르게 초록연두 빛이 더해져 싱그러웠고, 오래전 그날처럼 나무들이 올곧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더불어 청솔모, 토끼, 다람쥐 등 동물들이 예쁘게 핀 꽃들과 함께 동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2017년 남이섬의 5월은, 전 세계 책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섬으로 변신 해 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어린이 그림책을 매개로 하는 '남이섬세계책나라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 축제는 2005년부터 2년마다 남이섬에서 열리는 축제로 올해 8회를 맞이하였고, 그에 맞게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곳곳에 준비되었다. 거대한 숲을 이룬 남이섬이 책을 읽고, 보고, 먹고, 마실 수 있는 놀이터로 변신하는 마법을 부린다. 동화 속 에서만 보던 과자집이 눈앞에 존재하고, 온갖 나쁜 짓만 일삼는 마녀가 아이들 눈앞에 나타난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전 세계 동화책을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2박3일 동안 꼬박 있어도, 이곳을 눈과 마음에 다 담을 수 있을까?
"자유롭게 보시고, 3시까지 모여 주세요",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 마음이 이러했을까? 동화 속 세상 모습이 3시가 되면 사라질까... 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남이섬을 둘러 보기 시작했다.    
세계책나라축제를 열게 한 사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그의 이름은 낯설고도 익숙하다. 그렇다면? '미운오리새끼, 성냥팔이소녀, 백설공주, 인어공주' 등의 동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덧붙여 이야기 한다면? 친숙하다 못해 그 이름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그의 동화를 함께 읽으며 자란다. 그의 동화에 울고 웃고 그리고 감동하며 자랐다. 남이섬에는 2016년 안데르센그림책센터가 남이섬에 생겼다. 이곳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자와 후보자들의 도서를 전시‧보관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큰 책을 무질서하게 쌓아올린 형태의 마루에서 아이들은 여기저기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편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동화책 하나를 꺼내 읽는다. 나는 어색한 글자에 다시 덮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반면 아이들은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는 책을 계속 넘기고 넘기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어른들은 글자를 읽고 있고, 아이들은 '책'을 읽는구나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게 어른과 아이들의 차이일까?

발걸음을 조금 돌려 보게 된 공간은 2017 나미콩쿠르 수상작전 전시였다. 나미콩쿠르는 올해 3회째를 맞는 아시아 최대 국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으로, 올해는 89개국에서 1777명이 응모하는 등 매우 권위 있는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 브라티 슬라바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18선을 공간, 소리, 빛 움직임을 통해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입체 형태로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따로 또 같이 라는 말처럼 작품마다 각각의 특색이 보여 졌고, 전체의 공간은 동화 나라의 숲처럼 서로의 모습이 연결된 듯 보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경험한 느낌이 이러했을까?

이 외에도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많았다. 그래서 인지 아이 손을 잡고 가족끼리 나들이 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짧은 시간 안에 바라본 것들이 너무 공간 안에만 담겨있는 것 같아 아쉬웠다. 동화나라 같은 남이섬을 더 즐기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 꾹꾹 눌러 보았다. 그러나 1년도 아니고 2년을 기다려야 하니. 그 기다림 또한 쉽지 않겠구나 싶다.


사실, 어른들을 위한 축제
아이들은 항상 동화 속을 살아간다. 지인이 얼마 전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보여준 영상 하나가 있었다. 지인의 아이가 작은 장난감 차에 발을 넣으며 타겠다고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생각 그대로가 상상이고 동화이다. 아이들의 대화에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보인다. 날것과의 마주침은 감동이기도 하고 때로는 심장을 쿵 하게 만드는 뜨끈한 무엇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그 날것의 마음을 간직하고자 동화를 쓰고 읽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안데르센 또한 자신의 동화에 대해 "어린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작품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이섬에서 열리는 세계책나라 축제 또한 동화 같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연과 동화되어 어렸을 적 날것의 나와 마주하면 좋겠다는 숨은 의도가 함께 있지 않았을까? 동화책이 읽고 싶어지는 날들이 많아질 것 같다. 


조각은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요"
"음... 사색?"

너른 바다와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안경'의 한 장면이다. 모란미술관에 대한 설명 중 제일 먼저 들어온 '사색하기 좋은 야외 전시 공간'이라는 문구로부터 이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고, 꼭 가면 사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란미술관답게 입구에선 모란이 피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모란을 따라, 사람들은 실내 전시공간을 먼저 찾아 들어갔고, 나는 조용히 앉아있을 만한 벤치를 찾아 잠시 자리를 잡았다.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본다. 영화 안경에서처럼 너른 바다 대신 너른 들판이, 파도소리 대신 바람 소리가 사색을 즐기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말소리가 잘 들리기 위해 악기의 공명통 같은 침묵이 있어야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군데군데 있는 작품들은 사색을 위한 공명통인 듯 그 자리에 바람처럼 새소리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사색하기 좋은 공간.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실내 전시 공간에서는 "조각의 미학적 변용 展"이라는 주제로 전시가 한창이다. 이번 전시는 조형적 인식의 측면에서 현대 조각의 변용을 생각해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고 한다. 말이 어렵다. 조금 더 설명을 찾아 읽어 보았다.

'조각은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그리고 여기, 조각은 우리에게 물음으로 서있다. 물음은 조각적 변용의 원천이다. 그러기에 조각의 변용은 단순히 기법이나 형식 또는 주제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연 그리고 삶에 상응하는 미학적 물음이 조각으로 재현될 때 현전하는 변용이다'

그래도 어렵다. 작품을 보자. 작품이 평면을 통해 조각이라는 형상으로 보여 지기도 하고, 조각이라는 형상으로 평면에 그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변용이라는 이름을 썼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냥, 하나의 문장에 더 마음이 갔다. '조각은 이유 없이 존재 하지 않는다' 작가들의 작업에 "그냥"은 없는 듯하다. 선하나, 점하나, 터치하나에 작가가 살아가는 존재 이유들이 담겨있다. 그것을 알아가다 보면 전시의 해설처럼 '현전하는 변용' 이 되는 것인가?


시간이 멈추길..
이번 백제기행은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여행이었다. 5월의 계절을 듬뿍 담아 초록빛의 향기가 전해졌고, 남이섬과 모란미술관 두 곳 모두는 그 초록빛을 더 아름답게 담은 공간의 힘을 간직한 곳이었으므로.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이 담겨있던 여행이었으므로.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이 아쉬웠지만, 딱 그 아쉬움만큼의 감동이 마음에 남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한 달을, 그리고 일 년을 마음에 남은 그 감동으로 살아가며 아쉬움을 달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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