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대전의 역사와 문화를 한 줄로 엮다
여행장소 170회 백제기행 도시문화기행 아홉: 대전
작성자 김이정
기행일 2015-11-21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혹시 기행 가는 날마저 날씨가 좋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날씨는 맑았다. 대전이라는 도시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딱히 많지 않았다. 어렸을 적 가봤던 대전 엑스포, 꿈돌이 마스코트, 그리고 카이스트가 있는 곳. 막연하게나마 첨단과학의 도시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안고 대전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대전은 1904년 일제에 의해 경부선철도가 놓여 지면서 도시로의 역사가 시작된 도시다. 식민도시로의 성격이 짙게 배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죽하면 일제시대 대전역에 내리니 분명 조선 땅인데 흰옷 입은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눈에 띄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겠는가. 그만큼 대전은 일본인들이 많은 도시였고, 그 같은 역사 속에 대전 구도심이 형성되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다리 밑으로 대전천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물길을 따라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흡사 전주의 도토릿골과 비슷한 옛날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동네 느낌이었다.

 



그대로 남아 있었던 일제강점기 철도관사촌

첫 번째 기행 장소는 소제동 철도 관사촌이었다. 가는 길에 보았던 나무로 된 전봇대와 집의 벽에 한자로 붙어있었던 가 인상적이었다. 소제동은 원래 우암 송시열의 고택은 물론 기국정 정자, 솔랑산과 소제호수가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풍광이 좋아 중국 소주의 호수들에 버금가 소제호라고 불리웠다. 소제동의 모습이 크게 바뀐 것은 지난 1907년 일본이 이 곳 솔랑산 중턱에 태신궁이라는 일본 신사를 건립하고부터다. 경부선 철도가 생긴 이후 대전에 터를 잡은 일본인들은 대전역 주변과 지금의 인동과 대동부근에서 집단거주를 시작했다. 이들의 거주가 시작되면서 경관이 좋고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소제동에 신사가 들어온 것이다. 이후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대전은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철도원은 물론 기술자들의 거주가 늘어났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동쪽에 일본의 철도관사촌이 형성됐다. 대전의 역사와 함께 관사촌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해방 후 도시가 확장되어 가면서 소제동을 비롯한 원도심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소제동 지역은 대전의 대표적인 슬럼지역으로 남아있는 상태다. 길을 따라 40~50채 정도 남아있는 철도관사촌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집 마당에는 언제 심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감나무, 향나무, 석류나무 등이 많았다. 집 내부의 다락과 외부의 창고 건물이 독특하게 보였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많았지만, 현재는 비어 있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관사촌 북쪽에 위치한 42호 관사를 대전시와 목원대학이 공동으로 만든 대전 근대 아카이브즈 포럼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2 지역문화컨설팅 사업의 일환으로 임대하여 사용하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대전 근대유산을 활용한 지역 공동체 문화 활성화사업으로 연구소와 기념관, 모임 장소, 사진관 등의 용도로 쓰고 있어 누구나 방문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었다.

건물의 내부는 일부 수리했고 난방시설도 다시 하기도 했지만, 예전의 모습을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었다. 다락과 부엌은 물론 옛날 만화책에서나 볼법한 화장실이 마음에 들어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벽도 두껍고 지붕의 기와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도 약간의 수리만 더 한다면, 충분히 살 수 있는 공간이고, 멋스러움이 남아있는 터전이었다. 곳곳에 나무도 많고 도로에 차도 많지 않아서 조용히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정말 멋진 집이나 작업실이 될 것 같아보였다.

해방이 되고 1970년대 민간에게 불하된 철도관사촌은 지금은 그냥 일반인들이 사는 주택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적어도 10여 채 이상은 역사문화적인 가치와 의미를 각인하는 마음으로 수리를 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노력이 절실해 보였다.

이번 대전 기행은 걷고 또 걷는 기행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리 한 시간을 걸었더니 허기가 졌다. 대전에서의 점심은 칼국수였다. 대전의 칼국수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예전에 밀가루를 싣고 다녔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던 기차들이 대전역에 다 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들깨 칼국수, 고춧가루 다대기를 푼 칼국수 등 다양한 종류의 칼국수집들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의외로 문화예술도시 대전, 구석구석을 둘러보다

대흥동에서 점심을 먹고, 대전중학교로 방향을 잡고 10여 분 정도 걷다보면 테미예술창작센터를 알리는 빨간 표식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테미 언덕을 오르는 소담한 골목이 기다리고 있다. 옛 골목으로 두리번거리며 언덕을 오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짝 숨이 빨라진다고 느끼는 순간, 정상 언저리에서 대전이라는 공간을 응시하고 있는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1979, 대전 최초의 시립도서관으로 출발했던 테미도서관이 창작센터의 전신이다. 그렇게 도서관으로 시민들과 만나던 시간을 뒤로하고 2012, 신축된 산성도서관으로 도서관의 업무를 이전하면서 2014327일에 시각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센터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곳에서 불균형한 균형이라는 전시를 보고 근처에 있던 옛 충남도지사 관사촌으로 향했다. 충남도지사 관사는 옛 충남도 관사촌은 총 10개동으로 지난 30년대 건물 6개동, 70년대 건물 4개동으로 구성된 전국 유일의 관사촌 밀집지역으로, 이중 지난 1932년도에 지어진 도지사 공관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사전에 이곳의 형태가 적산가옥의 형태라는 정보를 접하고, 군산에서 가봤던 히로쓰 가옥을 생각하고 집안을 살펴보았는데, 군산의 것보다 훨씬 크고 최근까지도 실제 사람이 살았었기 때문에 실내 내부가 현대적이었다. 관사촌 골목을 따라 나와 다시 대흥동으로 걸어 파킹 갤러리를 운영하는 박석신 화가를 만났다. 파킹 갤러리(PARKing Gallery)는 대전 대흥동에서 꽤나 잘 나가던 모텔 주차장을 갤러리로 개조를 했기에 주차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파킹은 박석신 화가의 성인 박(Park)과 현재진행형(ing)의 합성어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박석신 화가는 이름을 꽃그림으로 그리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인 이름에 만족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한다. 이름이란 것이 본래 내가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 곳을 찾는 이들의 이름을 예쁜 꽃그림으로 그려주면 이름에 대한 만족도가 갑자기 올라간다고 한다. 박석신 화가는 이날 기행에 참여하신 한 분의 이름을 하나의 작품으로 멋있게 그려주기도 하셨다. 그 다음 행선지는 대전 기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산호여인숙이었다. 이곳은 1977년부터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여인숙으로 운영이 되다가 문을 닫은 후, 한동안 도심 속 폐가가 되어가던 여인숙을 임대 개조해 문화와 예술이 문안(問安)하는 공간으로 탄생한 산호여인숙으로 갔다. 대전의 중심인 대흥동에서 산호여인숙은 지역 문화를 리드하는 안내자이자 예술가임은 물론 여행자 간의 교류의 장으로 역할이 크다고 한다. 이곳에 들어서자 키치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산호여인숙의 1층은 문화공간으로 전시와 찌라시 도서관으로 운영되는 예술가들의 자유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날에는 관계의 미학이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지난 5월부터 만남을 지속한 작가들과 함께 산호여인숙 내에서 작용하는 여러 가지 관계를 작가적 시각으로 풀어낸 작품들의 결과보고전을 관람할 수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옛 충남도청사였다. 현재 충남도청사 본 건물은 1층이 대전근현대사전시관과 기획전시실로 사용되고, 부속 건물은 대전평생교육진흥원 대전시민대학과 대전발전연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충남도청이 이전하면서 많은 유동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서 자칫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곳이 될 뻔 했는데, 이 자리로 이전한 대전시민대학이 시민의 인기를 얻으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점점 많아지고, 또한 원도심 활용 방안으로 각종 행사와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대전에는 개발과 함께 많은 사연과 골목길들이 사라졌지만, 아직 원도심에는 많은 골목길이 남아있고, 그 골목길에는 숱한 사연들이 묻어있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었던 이 골목길들을 통해 걸으면서 대전의 과거와 현재를 보게 되었고, 한편 내일을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갖게 해준 기행이었다.

 


목록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