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슬프게 아름다운 군산
여행장소 149회 백제기행 - 다시문화유산답사 : 해양문화와 근대 유산의 땅, '군산'
작성자 서웅식
기행일 2013-12-21

슬프게 아름다운 군산

 

149회 백제기행 - 다시문화유산답사:

해양문화와 근대 유산의

 

 

 

독일에서 오랜 유학생활 중 나는 항상 한국 문화에 목말랐다. 아니 어쩌면 한국 사람에 더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귀국한지 두 달밖에 안 지났지만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백제기행과 함께 하는 두 번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 독일보다 매서운 겨울날씨가 말초 신경까지 둔하게 만들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볍고 빨라졌다.
오늘 여행의 목적지는 근대문화유산과 해양 문화의 땅 군산이다. 나는 전주에서 태어나서 자란 토박이지만 군산에 대해선 모르는게 너무 많다. 유학생활 중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역사는 줄줄 외웠지만, 정작 전주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군산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이번 기행에서 또 한 번, 주변에 가까이 두고도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제 탐욕의 흔적 발산리 유물
 
오전 답사지는 탑동삼층석탑과 군산 개정동 발산초등학교였다. “설마 이런 곳에 문화재가 어디 있다고?” 처음에는 일행을 초등학교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는 조법종 교수님의 말에 반신반의 했다. 그렇지만 학교 뒤쪽에는 놀랍게도 발산리 육각부도와 오층석탑(보물 제 276호), 그리고 석등(보물 제234호)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석등은 하대석에는 연꽃잎이, 간주석에 용이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런 형태의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희귀한 문화유산이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초등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군산에 농장을 개설한 일본인 시마타니 야소야라는 사람이 완주의 봉림사지를 비롯한 곳곳의 절터에서 가져와 일본에 가져가려고 농장에 모아 두었던 것이란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일제가 패망하는 바람에 그냥 달아났지만, 대부분 유물들의 출처를 알 수 없어 역사적 고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이 무엇보다도 아쉽다. 농장 중심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그의 숨겨진 개인 금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에는 철제 금고문이 달려 있고, 외부로 통하는 창문은 쇠창살과 철판으로 이중 방범 장치가 되어 있다. 도대체 뭘 얼마나 훔쳐서 넣으려고 이렇게 큰 창고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가 약탈되고 훼손되었을지 씁쓸한 마음에 자꾸만 울적해 진다.


 
아름답지만 처량하다 군산의 근대유산
 
군산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 붉은 벽돌로 곱게 빛바랜 군산세관의 외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100여 년 전 벨기에에서 수입한 벽돌로 지은, 고딕과 로마네스크가 섞인 일본의 독특한 근대 건축 양식이다. 이렇듯 일본이 공들여 지은 세관에서 조선을 영원히 강점하고자 하는 그들의 확고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구 조선은행, 구 일본 18은행, 진포해양공원, 근대역사 박물관, 부잔교를 관람하였다.
이번 군산 기행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역사다. 일본은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쌀을 증산 및 수탈했는데, 그것이 바로 ‘산미증식계획’이다. 지주를 위주로 하는 대표적인 일제농업정책으로 높은 현물 소작료, 공과금의 소작인 전가, 공산품과의 협상 가격차의 확대 등으로 조선 농민들의 생활을 압박하였다. 또한 농민을 상대로 하는 고리대금 사업은 농민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며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그 시절, 일본은 호남에서 수확된 쌀을 군산으로 모아, 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해설을 맡은 조법종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보니 우리는 어느덧 진포해양공원의 부잔교를 지나가고 있었다. 뜬 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다리는 수면에 맞춰 다리 높이가 조절돼 조수 간만의 차가 생겨도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일본이 쌀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 이 뜬 다리부두에는 수탈한 쌀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굶주림에 허덕이던 나라 잃은 백성의 억울함을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슬픈 역사 때문에 그런지 군산에서 내 눈에 비친 한옥은 뭔가 너무나도 많이 달랐다. 다른 곳의 한옥이 당당하고 늘름 했다면, 군산은 왠지 애달프고 처량하다. 어쩌면 우리 선조가 걸어온 처량한 삶을 반영한 듯, 만나면 반갑지만 한편으론 슬퍼서 한없이 울고 싶다.
 
 
군산에서 만나는 작은 일본
 
이번 백제기행 문화유산 답사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군산에서 한국 속 일본의 모습을 만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지만, 이를 빼고 나면 여행자는 군산의 일본식 사찰과 가옥에서 일본문화에 흠뻑 취할 수 있다.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 전국에 있던 487개의 일본식 사찰 중 유일하게 남은 절이다.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니 아픈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게 하는 곳으로 하나쯤 남겨둬도 좋을 듯싶다. 동국사의 대웅전은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형식의 일본 에도시대 건축양식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으며 소박한 느낌을 준다.
동국사를 나와 다시 큰길로 내려온 뒤 길을 건너자 아주 묘한 풍경이 내 앞에 나타났다. 히로쓰 가옥을 향하는 도보 5분정도 주변에 새로 들어선 일본식 가옥 및 숙박 시설은 나로 하여금 오래된 일본 영화 풍경 속 작은 마을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내가 도착한 이곳이 바로 ‘장군의 아들’, ‘타짜’ 그리고 ‘가비’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라고 하니 이런 느낌이야 말로 여행자가 느낄 수 있는 특권인 듯하다. 높다란 담장, 푸른색 쪽문 옆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현재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으로 불리는 이곳은 일제강점기 동안 군산 영화동에서 포목상을 하던 일본인 히로쓰가 지은 건물이다. 히로쓰는 대지주가 많았던 군산에서 드물게 상업을 통해서 부를 쌓아, 작은 농장을 경영하며 지방의회의 의원을 지냈던 인물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2층짜리 대규모 목조 주택으로, 일본 영화에 자주 나오는 전국 시대 사무라이가의 가옥 형태다. 바닥에는 일본식 다다미가 깔려있고, 방 한쪽에는 화로를 피웠던 공간이 남아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해설사께서 가옥에 얽힌 이야기를 잘 설명해 주고 계셨다. 해설 중에 신기한 것이 있었는데, 나무로 된 마루가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거였다. 이는 일본에 닌자, 자객 때문에 마루를 밟을 때 일부로 소리를 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 됐음에도 견고한 건축미와 아기자기한 일본식 정원이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기행을 전주에 돌아온 후에도 군산에서의 감흥은 잊히지 않았다. 이번 군산기행은 과거로 돌아간 듯 했던 시간여행, 그리고 일본에 다녀온 듯한 공간여행이었다. 가까이 있어 더 몰랐던 군산에서의 기억, 그래서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글 - 서웅식 KAIST 연구원

목록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