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도시는 사람을 품을 때 완성된다 | |
여행장소 | 189회 백제기행 근대의 기억을 만나다 - 목포 | |
작성자 | 이동혁 | |
기행일 | 2017-10-28 |
목포에 호랑이가 있다지요. 박제된 조선 호랑이 말입니다. 듣자니, 멸종된 조선 호랑이 중 유일하게 박제로 남은 호랑이라 합니다. 1908년, 붙잡힌 곳은 영광의 불갑산. 넉넉한 산세를 거침없이 호령하던 녀석도 결국 농부가 파놓은 구덩이만은 이길 수 없었나 봅니다. 사흘 밤낮 구덩이 속에서 발톱을 긁어대다 한 농부의 손에 붙잡혔다지요. 그렇게 녀석은 일본인 하라구치에게 논 50마지기 가격에 팔려 껍데기뿐인 박제가 됐습니다. 그래도 박제로나마 우리 곁에 남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옛말을 그대로 실천했으니, 호랑이로서 제몫을 다했다, 칭찬해야 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다고 여기는 마음과 꼭 같은 크기로 아쉬운 마음 역시, 듭니다.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조선 호랑이를 만나볼 수 없구나. 그리 생각하면, 어린 시절 머리맡에서 해주시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되곤 했습니다.
때론 경외스러운 신령의 모습으로, 때론 사람 꾀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여러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호랑이. 단군신화에선 곰과 경쟁하다 일찌감치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당하고 말았지만, 그런 것치곤 곰보다도 친숙한 게 또 호랑이입니다. 헌데, 그토록 친숙했던 호랑이는 대체 언제 이 조선 땅에서 사라진 걸까요? 일본의 동물연구가 엔도 키미오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이 나라(조선) 호랑이의 멸종에 깊이깊이 관여했다"고. 일제가 남긴 숱한 상처 중엔 조선 호랑이의 수난도 있었던 것이지요.
목포 유달초등학교의 호랑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일제강점기'. 목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삼백일흑의 도시. 섬들에 둘러싸여 파도가 잔잔하다는 그곳. 목포의 근대를 조심스레 돌아보았습니다.
과거와 만나는 시간
여행은 설렘을 동반하고, 그러한 설렘은 언제나 우리를 먼 곳으로 인도합니다. 근대의 기억과 만나는 여행. 벌써 189회를 맞이한 백제기행의 부제처럼, 설렘을 안고 찾은 목포에서 우리는 과거와 만났습니다. 전주에서 목포까지 165km, 고작 2시간을 달려왔을 뿐인데도 아주 먼 곳까지 온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단지 공간을 보지 않고, 공간에 켜켜이 쌓인 기억을 엿본 까닭이겠지요.
목포의 원도심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라면, 이런 기분이 들 이유가 없을 테지요. 사람은 마음으로 살고, 도시는 그런 마음들이 축적된 기억의 지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가, 건축물이, 그저 사물에 불과하지 않은 까닭이지요. 눈 닿는 모든 곳에 아로새겨진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이 강제로 아픈 기억을 들춰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아,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구나,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번 기행은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기회이기도 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목포는 우리 민족의 거울이었습니다.
유달산 자락, 목포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지에 자리 잡은 목포근대역사관 1관. 우리 기행 팀이 첫발을 내딛은 곳입니다. 과거 목포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된 건물이라는 설명에 마음이 절로 숙연해졌습니다. 수탈의 상징인 건물이 100여 년이 넘어서도 건재하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건물 외벽에 남은 총탄 자국은 6.25 당시의 흔적으로, 겹겹이 쌓인 지난 역사를 대변합니다.
내부는 세월이 지나며 상당 부분이 변형된 탓에 당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천정의 국화 문양이나 벽난로만은 오롯이 그때 그 시간을 담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사용한 축음기나 피아노, 냉장고 등의 사치품도 전시돼 있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행열차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이지요. 바로 '목포의 눈물'에 얽힌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을 표현한 노래였지만, 가사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어 '삼백년 원한 품은'을 '삼백련 원안풍은'으로 바꿔 불렀다지요. 구구절절 사무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으로 목포근대역사관 1관 뒤편, 숨은 듯 가려진 방공호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85m의 동굴로, 1944년부터 194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혹시 도주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 입구를 3개나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판 피와 땀이 어린 동굴이지요. 이처럼 눈 닿는 모든 곳에 우리 민족의 아픔과 설움이 배어 있는 목포.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님을 아는 까닭에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만 집니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 계단을 내려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향하는 도중에 이질적인 일본식 가옥을 몇 발견했지요. 아담하면서도 네모반듯한 건물이 자꾸만 시선을 붙잡습니다. 멈춰서 사진 몇 컷을 찍으면서도 마음속은 어딘가 불편했지요. 그것이 한낱 건물에 불과했다면, 그저 사물에 불과했다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을 것을... 어깨를 맞댄 것처럼 옹기종기 붙은 가옥들이 그저 정겹게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으로 남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행 팀의 다음 목적지이기도 했지요.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역시 목포일본영사관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뛰어넘은 듯 반듯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과 태양 문양이 건물 곳곳을 수놓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띕니다.
내부에는 목포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일제의 침략과 함께 시작된 간척사업. 그에 따라 변해가는 목포의 모습이 당시의 변천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안쪽에서 발견한 거대한 철문. 그것이 조신인들에게서 수탈한 돈과 문서를 보관한 금고의 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육중한 철문의 두께가 그들의 떳떳치 못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2층에서는 더욱 적나라한 일제 침략의 만행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제복을 입은 순종 황제, 고종 황제의 장례식 등 조선의 마지막을 담은 사진들 앞에서 문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살과 생체 실험, 위안부 침상 등의 사진들... 그 잔인함을 직시할 용기가 없어 끝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박제화된 도시, 그러나...
도시재생은 도시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목포의 도시재생은 일제강점기라는 근대 역사와 무관할 수 없지요. 도시 곳곳에 남은 일제의 흔적들은 그 재생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목포시의 근대 건축물들은 아직 재료조차 되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도심의 공동화, 재활용되지 못한 채 방치되는 건축물들... 마치 유달초등학교의 박제된 호랑이처럼, 원도심의 건축물들 차제가 방치된 박제처럼 보였습니다. 갑자옥 모자점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을 돌아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희망은 품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마저 뜸한 원도심의 한편에서 새로운 바람을 발견한 까닭이지요. 100여년 된 일본식 건물을 개조해 내부를 전시공간과 조합원의 휴게공간으로 꾸민 창작센터 '나무숲'은 2015년 12월 5일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작센터 나무숲이 문을 여는 데에는 문화예술협동조합 '나무숲'의 예술가들이 큰 역할을 했지요. 아직 다듬을 곳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고무적입니다. 그들의 앞으로의 발자취가 기대되는 이유지요.
이훈동 정원 역시 기억에 남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1930년대 일본인 우치다니 만페이가 조성한 것을 1950년대 조선내화주식회사 이훈동 회장이 사들였다고 합니다. 1만㎡의 거대한 정원 안에 조성된 130여 종의 다양한 수목과 일본식 석탑, 석등 등이 제법 멋들어지지요. 영화 <장군의 아들>을 비롯, 드라마 <모래시계>와 <야인시대>의 세트장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런 유명세를 제하더라도 정원으로서의 매력이 빼어난 곳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기억들 속에서 잠시나마 한숨 돌린 시간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여유도 잠시, 다음으로 찾은 조선내화공장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선내화공장을 철거하고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는 기사였지요. 한국 산업발전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는 건물을 그저 없애겠다고만 하는 행정에 도시재생 전문가도 아닌 저조차 얼이 빠졌습니다. 강동진 교수 역시 이에 대해 "도시재생의 방향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지요. 그렇지 않아도 석면이 문제가 되어 조선내화공장의 지붕은 전부 걷혀진 상태였습니다. 야윈 사람처럼 뼈대만 앙상한 건물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지붕뿐만이 아니라 건물도 함께 철거돼버릴 것만 같아 불안해졌습니다.
도시란 사람을 품을 때 완성되는 것이지요. 도시보다 사람이 먼저란 말입니다. 사람이 쌓은 기억과 추억, 그런 것들을 전부 등한시한 채 새 건물만 쌓아 올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뿐일지도 모릅니다. 페인트 냄새 채 가시지 않은 빌딩과 아파트에 향수와 추억이 어릴 수 있겠냐는 말이지요.
지금도 어린 시절 자랐던 옛집을 찾아가면, 묘한 향수에 빠지곤 합니다. 마당과 텃밭, 아궁이와 마루... 정겨운 기억들입니다. 그 장소가, 그 공간이 과거를 상기시키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목포는 아주 특별한 곳이지요.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목포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갑자옥 모자점, 다순구미마을...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이 바로 그곳에 어려 있었습니다. 목포 도시재생의 힌트가 거기에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레 돌을 던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