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라도 정도(定道) 1000년의 중심, 나주의 역사를 만나다 | |
여행장소 | 193회 백제기행 다시, 역사를 만나다② |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 |
작성자 | 이정우 | |
기행일 | 2018-03-17 |
나주 지역 잃어버린 고대사
나주 지역이 주목받게 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고학자료는반남지역의고분군들이다. 나주에서 발굴된 금동관유물의 화려한 장식성과풍부함에서볼수있듯이나주반남고분군은영산강유역옹관고분문화권의중심지였다. 반남고분군을 비롯해 한영 산 강 유역의 고분들이커다란옹관을사용하고있다는점에서한반도내의다른어떤지역과도다른독특한면모를지니고있다.
이 지역의 고분을 만든 토착세력은 수백 년 동안우리나라서남부일대에서성장하던마한의중심세력이었을것으로보는견해가많다. 영산강유역의 고분 세력이 백제와 바다 건너 왜의정치세력들과교섭혹은항쟁하면서남긴다양한유적들은우리나라고고학자료가운데에서도매우이채롭다. 유일하게 고대 왜와 관련된 유일한 흔적이전라도에서발견된경우다. 일본 무덤의 형식인 사다리꼴의 형태를 보이는고분의형태를두고. 이를 임나일본부설로 엮는 학자들도 있다. 아직 정설은 없지만 임나일본부설이라고 보기엔 그그빈도가드물게나타난다. 현재 가장 가까운 정설은 마한으로 온 일본 용병의무덤이아니었을까라는추정이가능하다.
나주 복암리 고분전시관은 마한 무덤의 특징과독특한아파트형식의고분군을잘재현해놓았다. 이곳은 고분으로만 특화된 박물관으로 이 지역에분포하는고분양식과출토물을통해당시매장문화에관심을집중할수있었다. 무려 1:1로 재현한 고분군은 미지의 역사가 남긴 무덤속으로들어가는독특한경험을선사해준다. 복암리 고분은 고대 마한문화를 발전 시켜 독특한영산강문화를창출했던마한후예들의고분이다. 동산으로 오해받아 다행히 도굴당하지 않은 모습그대로를간직하고있어역사적사실을추론하는많은근거를제공했다. 400여 년 동안 조성된 이 고분 안에는 다양한모양과양식의무덤들이있다. 하나의 무덤이 아닌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된무덤군이발굴되었다. 때문에 아파트 고분이라 한다. 마한 초기행태의 옹관과 백제양식의 석실 무덤이결합된독특한형식을하고있다. 특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롭게 혁신을 이루고자고자했던고대인의열정을고스란히보여준다. 발굴된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 옹관에는 태아처럼구부리고있던모습도보였다. 이는 후세를 위해, 새로운 삶을 기원하는 풍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시실엔 다양한 동물 인형이 있다.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동물 인형을통해호기심을유발하고한번이라도더보게만들어서서히역사에친근하게만들기위해한작은장치라한다. 다음에는 한국 동물들의 인형들로 교체해달라는의견이나왔다.
특별실에선 고인돌복원프로젝트 특별전을 열리고고있었다. 당시의 유골들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이 유골들은농부에의해발견된영동리 1호 고분군에서 수습한 것들이다. 밭을 만들기 위해 숲을 일구던 중 발견되었다. 유골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영동리 1호분 2호 돌방무덤에 섬유 골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가족들이 함께 안치되어있었다. 이 유골들을 고고학과, 의학, 치의학, 법의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결과들을 모아 복원한결과그들의얼굴모습이닮아있었고일가족으로추정되는그들의모습이 3D로 재현되어 영상으로 전시되고 있다. 고인돌을 근거로 해서 시대를 초월한 옛사람들과조우하고그들을통해다시그시대의문화를읽을수있다는사실이신기했다.
열린 문화공간
나주는과거백제시대당시 '발라'라 불렸다. 이는 반 남군으로 지역명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있다. 통일신라 시대 땐 나주를 금성 군이라고 했다. 이후 903년(효공왕 7)에 나주라 개칭되었다. 여기서눈여겨볼만한점은금성의금(錦)과나주의나(羅) 는모두비단을뜻한다. 나주는고대삼한시대부터실크천연염색이발달했다발달했다. 그래서 나주의 농특산물상표도 비단인가보다.
색깔이 다양한 외관이 눈을 확 사로잡는 이곳은나주천연염색문화관이다. 문화관의 내부는 각각의 염색 천으로 꾸며져 있다. 천연염료를 이용해 다양한 색채를 낸 화려한 옷감과과그옷감으로만든옷이며, 스카프, 소품 등이 전시되어있었다. 특히 쪽이라는 염료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수십아니수백까지의푸른빛을내는쪽염색은많은여성참가자들의관심을독차지했다. 색채의 마술이랄 수 있는 다양한 염색의 방법과역사를볼수있어서좋았다. 특히이곳에서는천연염료를판매하고다양한염색상품이전시된아트샵이있었는데점심시간이라문이닫혀아쉽게발길을돌릴수밖에없었다.
국립나주박물관은 영산강유역에 남아있는 고고 자료를자료를보존하고전시하며호남지역발굴매장문화재에대한수장고의기능을수행하기위해건립되었다. 국립박물관으로서는 처음으로도 심이 아닌 전원 속에속에자리잡아천천히시간을보내며여유있게휴식의시간을보낼수있는공원같다.
복암리 고분군이 마한의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보여주고있다면나주박물관은영산강유역의마한문화를망라하여전시하고있다. 영산강은 예로부터 풍요로운 삶의 터전으로 이지역이문화적으로발전하는바탕이되었다. 중요한 뱃길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통일신라 시대 청해진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던배들이드나드는길목인완도에자리잡고있었고, 고려 시대나 주는 영산강 뱃길의 중심지로 성장했다다. 뱃길을 따라서, 제사 터, 창고와 같은 유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고분들에 묻혀 있던 대형 옹관은 그 크기가어마했다. 같이 발굴된 금동관, 금동 신발과 같은 최고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은당시뛰어난문화, 예술적 수준을 보여준다. 박물관 한쪽엔 석등 하나가 외로이 서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버텨온 나주 서성문 안석등이었다. 이 석등은 1929년 일제에 의해 총독부박물관 야외전시품으로로고향을떠나있다가 88년 만에 귀향했다. 화사석과 보주가 파손되고 결실되어있어 당시 새로로만들었는데불이밝혀지는화사석에나주에서박물관으로이주하고보주와화대석을보수했다는내용을새겨넣었다.
박물관 바로 앞길 건너에 덕산리 고분군 몇 기가있었는데영낙없이야트막한동산의모양을하고있어어릴때눈이쌓이면비료포대를타고내려오던그시절의모습을떠올리게만드는모습이었다.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 따뜻한 봄 풍경과 너무 잘어우러져있었다. 내가살던경상남도창녕에도고분이참많았는데는데. 그 시절을 떠올리기에 많이 따뜻해진 날씨에여기저기서파릇파릇돋아나는봄나물과길잃은조그마한청개구리가한걸음먼저날씨를즐기고있었다.
나주목, 천 년 목사 고을
나주 지역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관통하는 천 년동안호남남부행정중심지로서의위상을유지했다. 나주가 이 일대의 행정중심지로 본격적으로 자리하게하게된시점은고려성종 2년(983년)이었다. 전국 12목가운데하나인 '나주목(羅州牧)' 이이곳에설치되었다. 이 나주목은 1895년 나주관찰 부가설치될 때까지 무려 1,000여 년간 유지되었다. 나주를 '천년고도(千年古都)''천 년 목사 고을' 이라고부르는배경이다.
나주목의 천 년 이야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곳이나주읍성고샅길이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진한 나주곰탕의 그 맛에감동한뒤전라도를품고다스렸던터줏대감나주의천년을찬찬히거닐었다.
가장 먼저 만난 곳은 나주목 문화관이다. 나주가고려시대부터조선시대까지약천년동안 '목'목(牧)'위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기 위해개관한전시관으로인형으로복원한길게늘어서행렬하는모습과전시된다양한자료를보며조선시대나주읍성의모습을잠시상상해볼수있었다.
잠시 걷는데 지쳤다면 쉬어가기 딱 좋은 금성관. 나주목의 객사다. 정문에서부터 3개 문을 거쳐 들어가는 전국 최대의 규모를자랑한다. 금성관 좌우로 펼쳐진 마루에 앉아 잠시 땀을식혔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리가싫지않았다. 그렇게신기한나무가있는목사내아 '금학헌'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선 시대나 주목에 파견된 지방관리인 목사의살림집으로목사내아'금학헌'이다. 내 아는 조선 시대 지방관아에 있던 안채를가리키는말로요즘으로말하면도지사관사라고본다. 금학헌의 이름은 거면 고금(琴), 개학(鶴)을 써서 선비의 상징인 거문고와 학을상징한다. 이곳에선 한옥숙박체험을 할 수도 있다. 내아의 서편담장에는 오백 년 수령의 팽나무가 서있다. 이 나무는 옛날에 큰 벼락을 맞고 두 쪽으로갈라져사람들은모두죽게되었다고생각했다. 그런데 이 팽나무를 나주사람들이 끈으로묶어주었더니기적처럼되살아나푸른나뭇잎이피어났다. 팽나무는 이제나 무를 찾는 모든 이들의 소원을성취해주는기원의나무로자리잡았다. 나도 아무도 몰래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팽나무뿌리한쪽에소원을하나묻어두었다.
너른 나주목을 둘러보기 좋은 나주읍성 옛 사대문. 그 사대문에 올라서면 과거 나주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직 복원하고 있는 북쪽의 북망문을 제외한 남고문과 동점문, 서성문은 복원을 마친 상태다. 그중 우리는 가까운 서문, 서성문에 올랐다. 본래 이름은 영금문으로 문헌조사를 거쳐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을 끝냈다. 서성문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관계자 분이 올라가도 된다 말하였다. 성문에 올라가는 건 처음이다. 생각보다 높은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섰다. 나주를 한눈에 천천히, 그리고 가만가만 보고 싶다면 꼭 성문에 올라가보는걸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특별한 당간이 있는 곳. 석당간으로 향했다. 나주 동문 인동 전문 밖에서 있는 석당간으로 고려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점은 다니던 도로보다 한걸음 정도 밑에내려가있었다. 내려간 것이 아니라 원래 이 땅의 높이가 석당간이 자리잡은 높이고 지금의 터전이 더 높아진 것이라 한다. 이렇게 거대한 당간을 세울만한 권력을 가진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과거 나주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인 것 같다.
영산강은 남도의 젖줄이다. 강이 흘렀기에 생명이 있었고, 생명이 있었기에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한의 시간부터 흐른 나주의 시간은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까지 흘러 지금에 다다랐다. 그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우직하게 걸으며 역사를를되돌아보는시간을가질수있는것같았다.
걷기에 참 좋은 때, 봄의 기운이 다 가기 전에 시대를 거슬러 한걸음 한걸음 직접 밞아보며 천년고도 나주의 역사에 말을 걸고 그 시대를 가로질러 건너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