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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월의 흔적 부산, 그리고 도시재생
여행장소 181회 백제기행 생활과 예술, 역사와 문화의 현장
작성자 도휘정
기행일 2017-02-18



무엇이든, 성장이 멈추는 순간, 쇠퇴의 위기는 찾아온다. 그 중에서도 도시의 쇠퇴는 단순한 공간의 쇠락이 아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정서에 깊은 영향을 주는 일. 우리가 도시재생을 주목하는 이유다. 
오래되고 낡은 도시를 재생하는 것. 그것은 마치 상처 난 곳의 고름을 짜내고 적절한 처방으로 새살이 돋게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도시의 기능을 다시 회복시키는 과정은 고통과 시간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람의 정성과 인내뿐이다.
도시재생 전문가인 강동진 경성대 교수는 도시재생에 있어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강동진 교수는 "도시재생은 지역민들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재생되어야 진짜 도시재생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앞서 말한 사람의 정성, 사람의 인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무심코 불어오는 바람 한 자락에도 짠내, 땀내, 사람 사는 냄새가 뒤섞여 있는 곳. 2월의 백제기행은 부산이다. 전주도시재생센터와 공동으로 기획된 이번 기행의 화두는 모든 도시의 고민, 도시재생이다.


부산은 영화의 도시다. 1999년 부산영상위원회가 개관한 이래 촬영을 지원한 영화와 영상물은 1091편에 이른다.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는 <국제시장>부터 원전문제를 다룬 <판도라>까지, 60~70년대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부터 초호화판 영화까지,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가진 영화들이 부산에서 촬영되었다.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부산은 다양성을 가진 도시다.
이런 다양성 속에서도 부산 사람들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산으로 간 사람들과 바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한국의 산토리니' '한국의 마추픽추'로 불리는 감천문화마을이 산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근대수리조선 1번지로 불리는 대평동 깡깡이 예술마을은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미 거대해진 부산. 그 속에서도 산과 바다를 의지해 살아온 부산 사람들의 삶이 담긴 감천문화마을과 깡깡이 예술마을은 역사와 문화를 활용한 도시재생이 이뤄지고 있었다.
낡은 공간을 새롭게 하고, 오래된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주체는 이 마을의 주민들. 다시, 사람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게 하는 것 역시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산으로 간 사람들, 감천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의 꼭대기, 하늘마루에 올라서니 발밑으로 파스텔톤의 지붕들이 펼쳐진다. 산자락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계단식 집단 주거형태와 모든 길이 통하는 미로미로 골목길은 감천만의 독특한 감성을 전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도 다가서면 그 속살을 내비치기 마련. 감천문화마을 역시 골목골목 사연이 서려있지 않는 곳이 없다. 감천문화마을은 1955년 태극도 신자 800세대 4000여 명이 집단 이주한 곳이다. 수천 명의 집단 주거지를 확보할 수 없다보니 부산시의 알선으로 감천문화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초창기 마을이 형성될 때 몇 가지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첫째는 앞집을 가리지 말 것. 둘째는 화재의 위험에 대비해 마을의 모든 길을 연결시킬 것. 강동진 교수는 "도시를 가꿀 때 원칙을 만드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며 "감천문화마을도 형성 초기 이런 원칙과 규제를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감천문화마을은 경사가 급하고 서향이어서 재개발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2009년 재생 개념이 들어오면서 마을에 새로운 변화가 왔다. 처음 시작은 진영섭이라는 미술가의 노력으로 씨앗이 만들어졌다. 이후 지역 예술인들과 주민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고,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한 '감내풍경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며 마을 곳곳에 예술작품이 자리 잡게 됐다.
현재 감천문화마을은 찾는 관광객은 연간 160만 명. 감천문화마을 역시 관광화 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골목 마다 사람들이 넘쳐나니 실제 거주하는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땅값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도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된 주민협의회였다.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는 마을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마을기업사업단과 매월 마을 소식을 모아 신문을 발행하는 홍보단, 방문객 안내 업무를 맡고 있는 봉사단, 주민들의 소규모 집수리 등 주민 환원사업을 시행하는 생활개선사업단, 민박사업을 총괄하는 민박사업단, 그리고 감천문화마을의 골목축제와 문화공연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문화예술사업단으로 구성돼 있다.

감천문화마을이 초창기 문화예술을 통해 유명해 졌다면, 지금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을기업 운영을 통해 공유경제시스템을 운영하는 선진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감천문화마을의 마을기업은 9개. 주민협의회가 감내카페, 감내맛집, 고래사어묵, 주차장, 게스트하우스, 아트숍 등을 운영해 한 해 15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인건비와 운영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주민복지기금으로 적립한다. 마을 초등학교 학생들의 교육여건 개선을 위해 학교지원사업비를 지원하고, 어르신들을 위해 공동샤워시설을 운영하고 이불 빨래를 맡아준다. 감천행복버스를 운영하고 집수리와 쓰레기 봉투 등을 지원하며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복지를 통해 관광화로 인한 불편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나간다.
마을기업들은 마을 주민들을 채용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현재 정규직 25명을 포함해 160명이 넘는 주민들이 마을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감천문화마을 주민들은 지난해 도시계획을 바꾸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도시계획상 도로가 마을의 중간을 지나게 됐는데, 주민들의 반대로 20m 정도 진행됐던 공사가 취소되었다. 전순선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 부회장은 "주민 대부분이 50~70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만큼 마을에 대한 애정이 크다"며 "우리 마을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는 만큼 마을의 독특한 경관을 지켜야 한다는 게 주민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도로 주변의 집값이나 지가가 올라갈 것이란 기대도 있었지만, 이를 절제하며 모두에게 이롭게 합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감천문화마을의 힘이었다.
전순선 부회장은 "주민이 열정이 없고 가만히 있다면 행정은 도와주지 않는다"며 "지속가능하고 주민들이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바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깡깡이 예술마을

깡, 깡, 깡…. 그 옛날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아낙들은 깡깡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깡깡이는 배의 페인트와 녹 따위를 벗겨내기 위해 악을 쓰며 두드렸던 망치 소리. 오늘날 깡깡이 작업은 크게 줄었지만, 누구나 대평동 앞바다에 서면 가슴으로 듣게 되는 소리다.
대평동 깡깡이 예술마을은 수리조선업이 발달돼 있다. 눈에 들어오는 건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과 길가에 놓여있는 온갖 부품들과 고철들이다. 여기에 하루 종일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알 수 없는 기계음, 그리고 쇠냄새와 기름냄새, 바다냄새가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다. 낯선 이들에겐 흥미로운 풍경이지만, 매일을 살아가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다.

현재 대평동(현 남항동) 일대에서는 깡깡이 예술마을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2015년 민선 6기 공약사업인 '예술상상마을' 공모에 선정, 올해까지 진행되는 문화예술형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부산시는 이곳을 제2의 감천마을로 만들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사실 대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크다. 근대조선산업의 발상지이자 수리조선산업의 출발지로서 그만큼 다양한 근대산업유산과 역사문화자원들이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1887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목선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졌으며, 1937년 국내 최초의 철강 조선소인 조선중공업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이곳에 많은 공장을 세우고, 영도다리를 만들었다. 실제로 부촌이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산업과 원양어업이 발전하는 동안 부산에서 세금을 가장 잘 낸 지역이었다.

깡깡이 예술마을 프로젝트는 해양, 재생, 커뮤니티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항구도시 부산의 원형을 재창조해 나가고 있다. 아직 사업이 시작된 지 6~7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아 큰 변화는 없지만, 쇠퇴해 가는 조선소 배후지역을 새로운 에너지로 채우고자 하는 움직임은 부산 사람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닮아있었다. 
프로젝트는 크게 영도 도선 복원 프로젝트,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을박물관 프로젝트, 문화사랑방, 공공예술페스티벌, 깡깡이크리에티브로 구성된다. 
영도 도선 복원 프로젝트는 지금은 끊어진 뱃길인 영도 도선을 복원하는 것이다. 2008년 폐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도 도선장에서 자갈치 시장까지 가는 객선이 운행됐다. 1934년 영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영도와 뭍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것. 영도 도선 복원은 항구도시 부산의 근현대사를 되살리고 마을 공동체 자립에 기여하는 특화된 관광상품으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퍼블릭아트 프로젝트는 소리, 빛, 색채 등 다양한 매체와 요소를 활용한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작업을 통해 부족한 주민편의시설을 확충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구름 모양의 가로등과 닻 모양의 마을 상징물, 마을버스 터미널의 벤치 등이 설치됐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대평동을 상징하는 다양한 재료가 결합해 만들어 졌다는 점에서 더욱더 눈길을 끈다.
낡은 창고나 공업사의 벽면을 페인팅해 거리에 활력을 주는 페인팅시티 월아트 프로젝트는 자갈치나 영도대교에서도 한 눈에 보이는 동명철공창고를 중심으로 6곳의 공업사에 색을 칠했다. 마을의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도록 배에 많이 쓰이는 색깔을 택하고, 깡깡이 망치, 배를 수리하는 모습 등을 형상화했다. 덕분에 무채색의 어두침침했던 거리는 한결 밝아졌다.
주민들이 선박 수리에 있어 한국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수리조선 박물관도 곧 개관할 예정이다. 벌써 주민과 예술인들이 어우러져 동네잔치도 열고, 마을신문도 제작하고 있다.

깡깡이 예술마을 조성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다.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 송교성 사무국장은 "깡깡이 마을이 부산 사람들도 보기 힘든 항구도시의 근대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시골 마을처럼 튼튼한 공동체가 있어 사업 대상지로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리를 만들어 주민들이 직접 마을 해설도 하고 카페도 운영하는 등 주민들 안에서 지속가능성을 찾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송교성 사무국장은 도시재생은 정답이 없는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답은 없지만, 올바른 방향은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행정과 민간의 전문가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잘 결합하는 과정 자체가 도시재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함께 둘러본 곳

<영도다리>
영도다리는 1934년 일제에 의해 준공됐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도개교(跳開橋)로 중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려 통과시켰다.
안전진단 검사에서 위험등급을 받아 철거 논란을 겪기도 했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건축물로 평가되어 2013년 복원 이후 매일 오후 2시 다리를 드는 도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매일 15분간 교통을 통제하면서 정작 부산 사람들은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에게는 자갈치시장과 남포동 일대를 함께 둘러보는 관광코스로서 큰 인기다.


<비석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곳이다. 해방 이후 6.25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때 묘비와 묘의 경계석 등을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피란민들의 애환이 닮긴 삶의 터전으로, 지금도 계단이나 바닥, 담장 등 주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임시수도기념관>
6․25전쟁으로 3년간 부산이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했을 당시 대통령 관저로 이용됐던 곳이다. 대통령의 집무실, 응접실 등을 당시 분위기 그대로 재현해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치의 최종 결정과 대외적인 외교업무가 이뤄진 역사적인 장소로서 의미를 더했다.
최근 부산에서는 피란수도 관련 14개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직 걸음마를 떼는 단계지만, 근대기에 최초의 대한민국을 보여주는 유산이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부평깡통시장>
일제가 만든 부산 최초의 공설시장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소시지와 여러 가지 깡통류를 팔고, 일본에서 밀수입한 양담배와 양주 등을 거래하면서 '깡통시장'으로 불리게 됐다. 현재도 양주나 깡통류를 파는 가게들이 남아있으며, 어묵가게가 한 골목을 이루고 있다. 2013년에는 국내 최초로 야시장을 개설해 세계의 전통음식들과 먹을거리를 팔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보수동책방골목>
보수동책방골목은 우리나라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헌책방 골목이다. 피란 시절, 부산 보수동 일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경기고, 경기여고 등 40여 개의 피난학교가 세워졌다. 당시 학생들이 쓰던 헌 교과서를 거래하거나 미군부대에서 나오던 군인들이 보던 잡지 등을 거래하면서 헌책방 골목이 형성됐다. 현재도 200m 좁은 골목 구석구석에 60여 개의 헌책방들이 집결돼 있는 세계 유일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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