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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픔을 딛고 다시 도약하는 섬
여행장소 185회 백제기행 아픔과 시련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소록도
작성자 김형미
기행일 2017-06-17



"소록도 바다는 한센인의 눈물이요, 바람은 한센인의 한숨이다."


소록도(小鹿島). 하늘에서 바라본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라남도 고흥반도 끝자락 녹동항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작은 섬. 면적은 4. 42제곱km밖에 되지 않는, 여의도의 약 1.5배 정도 된다. 620여 명의 한센인 외에 200여 명의 병원 직원, 그 가족이며 자원봉사자들까지 합해 천여 명이 사는 곳.

푸른 바다와 울창한 나무가 어우러진 수려한 절경을 지니고 있지만, 한때 노역에 신음하던 한센병 환자들이 탈출을 위해 몸을 던지던 바다가 있는 곳. 작은 크기에 비해 그들의 아픔과 애환이 묻어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사연 많은 섬이기도 하다. 단절과 절망으로 기억되던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를 가둔, 악명 높은 '소록도 갱생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소록도는 강제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한센인들은 이곳을 '한국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 불렀다.

그러던 것이 2009년 3월, 고흥 도양읍과 거금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되었다. 이로써 1916년 강제 격리 수용된 지 93년 만에 비로소 주민들에게 채워진 물리적 격리의 세월이 끝나게 된 것이다. 말했던 바와 같이 소록도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었다. 섬 일대에서는 해산물도 잘 잡혔고, '섬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격리되면서, 기후가 온화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이 많으며, 육지와 가까워 물자를 나르기가 쉽다'. 이런 천혜의 자연조건이 한센인들을 위한 섬으로, 소록도 자혜의원(慈惠醫院) 설립의 적지로 선택된 조건이 되기도 한 것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역사는 1916년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시작된다. 당시 일본 총독부에 의해 개원된, 조선 내의 유일한 한센병 전문 의원. 평범한 명칭과 달리 자혜의원은 의료시설이라기보다 격리 공간에 가까웠다. 일제는 '조선나예방령'을 근거로 전국에서 뚜렷한 주거지 없는 한센인들을 강제로 끌어 모아 소록도로 보냈다. 정당한 법적 절차는 물론 의사의 진단도 없이 환자들은 섬으로 끌려와 감금당해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40여 명의 한센인이 입원했지만, 환자 수가 급증하자 병사 신축 등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소록도는 한때 한센인 포함 6000여 명이 거주하게 되었다.

더욱이 소록도 원장은 입원환자에 대한 막강한 '징계 검속권'이 부여됐다. 이로 인해 환자들은 재판 받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순순히 병원 당국의 '철권통치'에 따라야 했다. 1945년 해방을 맞고 나서야 자치권을 요구하게 된 원생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협상 대표자 84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만다. 이후 참사 56년 만인 지난 2001년, 유골을 발굴해 학살을 당했던 현장에 추모비를 세웠다. 84명의 희생이 헛되지 않음을 비는 간절함으로, 한센 가족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소원하는 상징적인 기념비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은 6천여 평의 중앙공원이 둘러싸고 있다. 잘 굽은 소나무, 그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굵은 향나무와 멋드러진 종려나무 등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는 중앙공원. 이곳은 3년 4개월 동안 연 인원 6만여 명의 환자들이 강제 동원하여 조성한 일본인들의 낙원이다. 즉 이 모든 것은 성치 않은 한센병 환자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것. 그 과정에서 펼쳐진 강압의 역사는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이 눈물겹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도 공원 안에 들어서면, 환자들이 직접 가꾸어 놓은 '당신들의 천국'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중앙공원 곳곳 환자들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기념물들도 눈길을 끈다. 특히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구라탑. 미카엘 천사가 창으로 한센균을 찌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탑에도 깊은 사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 소록도 병원장 중 가장 악랄했던 원장은 4대 스오 마사토였다. 그는 1933년 부임해 1942년 피살되기까지 9년간 재임하면서 자신의 동상을 세워 원생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마침내 원생 이춘상이 스오 원장을 살해하고, 자신도 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한다. 그 후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병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구를 새긴 구라탑이 세워진 것이다. 

소록도 중앙공원은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지만, 공원 곳곳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곳이기에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곳에 한하운 시인의 시비도 있다. 시비는 악명 높은 스오 원장 당시 수간호사로 재직하며 한센인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사토' 간호사가, 한센인들을 채찍으로 때려가며 옮겨놓은 돌이다. 이곳 어르신들은 이 바위를 사토한테 맞아죽으나, 옮기다 깔려서 죽으나, 혹은 지쳐서 죽으나 어쨌든 갖다 놓기는 해야겠으니 '죽어도 놓고 죽자'고 하던 의미에서, '죽어도 놓고' 바위라고 부른다. 이밖에도 환자들의 고달팠던 삶은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무려 열 곳이나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섬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산재한 문화재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소록도는 거대한 문화유산의 보고인 셈이다.

소록도 입구를 들어서면 '수탄장'이 나온다. 이곳은 환자를 돌보는 '직원지대'와 나환자인 '병사지대'로 나눴던 경계선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센병 환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소라선착장도 보인다. 1950부터 약 20여 년간 철조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갱생원에선 자식이 있어도 전염병을 우려해 나환자 자녀를 보육소에 격리해 생활케 했다. 부모와 자식은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되었는데, 도로 양 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했던 탄식의 장소였다. 현대판 이산가족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 슬픈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근심(愁)과 탄식(嘆)'의 장소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 수탄장이다.

수탄장을 지나 끊임없이 늘어선 소나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본격적으로 병원 건물과 검시실, 자료관, 역사관 등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대부분이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근대식 건물이다. 그 중에서도 감금실은, 일제강점기 소록도 병원장이 법적 근거도 없이 한센병 환자를 강제로 구금하고 감식 처분, 체형 등을 가하던 건물이다. 역시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의 박공집으로, 건축물의 형태가 간결하고 단순하다. 네모반듯한 대지의 남과 북에 각각 한 동의 건물을 나란하게 짓고, 두 건물 사이를 'ㅡ'자형 회랑으로 연결하여 외관상 'H'자형을 이룬다.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쌓고 쇠창살을 박아놓아 밖에서 볼 때 작은 교도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감금실. 수용된 한센병 환자를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켜 재판도 없이 환자를 구금하고, 체형을 가하던 곳이다. 해부실이라고 불리웠던 감금실 바로 옆 검시실은 단종수술을 받던 현장이다. 기록에 따르면 감금실에 수용된 환자는, 출감할 때 한센병의 절멸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바로 검시실로 끌려가 강제로 수술을 받았다. 단종수술은 한센병 환자를 절멸시키기 위해 1927년 일본 생리학회에 의해 제기된 것이었다. 현재 검시실에 남아 있는 시체 해부대와 검시대, 세척시설이 말없이 한 시대의 악행을 증언하고 있다.


"그 옛날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여기 나의 25세 젊음을/파멸해가는 수술대 위에서/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한 청년이 남긴 시 '단종대'의 한 구절이다.





사망자는 가족이 의사와 상관없이 우선 검시절차를 마친 뒤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후 시신은 구북리 뒤편 바닷가의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이를 두고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고 한탄했다.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시신해부요, 세 번째는 화장. 구타를 일삼고, 낙태와 강제 불임수술이 자행됐던 제 66호 검시실과 67호 감금실. 건축적 가치보다 서러운 사연으로 방문객의 가슴을 젖게 하는 곳.

소록도 병사성당 또한 소록도 거주 한센인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하여 지은 벽돌조 성당 건축물이다.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아픔의 치유를 위한 영적 장소가 되었던 건물이며, 그런 의미로 한센인과 함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40여 년간 한센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였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이 거주했던 사택도 있다. 현재는 등록문화재 제 6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 한센인의 피고름이 얼굴에 튀는 것도 마다 않고 헌신했던 두 수녀님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검시실에서 갱생원 원장 관사에 이르는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식량 창고. 하역과 보관의 편의를 위해 신생리 해변에 지어진 이 창고는, 정면을 제외한 3면이 바다에 면한 독특한 건물이다. 68개 기둥의 배치가 간결하고 기둥을 연결한 아치는 견고한 느낌을 준다. 통풍 기능도 뛰어나 실내에 습기가 차지 않고 음식물이 쉬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섬 안의 많은 건물이 그러하듯 식량 창고 또한 환자들이 밤낮으로 벽돌을 찍어 12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밖에 소록도에는 식민제국의 잔재를 보여주는 신사가 황폐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1만 365명의 위패가 봉안된 만령당,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자체적으로 설립했다는 역사성이 있는 구 녹산초등학교 교사. 그리고 한센병 치료를 위한 소록도병원 초기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서, 당시 목조건축물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성실고교 교사 등이 슬픈 역사를 드러낸 채 섬을 지키고 있다. 등록문화재는 아니지만 중앙공원의 구라탑과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진 바위, 벽돌공장 터 등이 소록도의 명소로 손꼽힌다.


국립소록도병원이 2016년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붉은 벽돌의 한센병박물관. 소록도 사람들의 생활 유품을 통한 삶의 흔적들, 한센병 극복을 위한 갖은 노력,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통한이 잘 기록 보존되어 있다. 과거 문둥이, 나병 환자로 불리며 상처받았던 한센인들의 슬픔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하는 섬. 소록도에 얽힌 회한의 역사를 돌아보자니, 현재 평균 연령 74세 이상의 환자 700여 명이 가슴에 밟힌다.

"한센인의 치료 및 주거공간으로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문구를 보며 무려 5시간 동안 둘러본 소록도. 섬 안에서의 숙박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저녁 6시 이전에는 육지로 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피맺힌 고름을 빨아들인 섬의 절경과 역사적 기념물 등으로 지금은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섬. "소록도 바다는 한센인의 눈물이요, 바람은 한센인의 한숨이다."라고 기억되는 모든 역사가 보상받을 수 있는, 그런 소록도가 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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